나의 장례식
진정 울어 줄 이 있을까?
먼저 가신 아버지가 말해주셨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살아온 삶의 결과이니
머뭇대는 내게 아버지가 물었다
아들은 사람들에게 정직했니?
아들은 사람들을 사랑했니?
그거면 됐다
아버지의 장례식
슬픈 축제의 장에서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서
# 아버지를 생각하며 쓴 네 번째 시이고 발행순으로는 세 번째입니다.
나의 사춘기 시절.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했고 날 위해 울어줄 사람이 있을까를 고민했었다. 그때 나는 나의 성격을 조용하고 내성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친한 친구도 별로 없다고 느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용하다기보다는 신중했고 외향적과 내성적 중간 정도였으며, 주변에 같이 다니는 친구들은 항상 있었는데 미성숙했던 나는 나를 낮게 평가하고, 깊은 우정에 목말라했었던 것 같았다.
나의 사춘기는 나에게 죽음에 대한 질문 ( 내가 죽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어줄까?) 만 남긴 채 요란하지 않게 지나갔었고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해주셨다.
그때 나는 아직 군대를 가지 않았던 20대 초반 어린 나이였고 아버지는 잔병치레도 거의 없이 건강하셨던, 50이 넘지 않은 젊은 나이였다.
아버지는 풍족하지 못한 시골출신에 8남매의 둘째였으나 첫째형이 일찍 돌아가셔서 첫째로 크셨고, 그시절 많은 분들이 그랬듯 아버지는 집안을 책임지느라 많이 배우지도 못하셨다. 젊은 나이에 서울로 상경해 여러일을 하셨고 어머니를 만나 결혼도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동생들을 뒷바라지 하며 우리들을 키우셨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공장에서의 사고로 오른손 손가락 4개를 잃어버리셨지만 항상 당당하게 생활하셨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도 아버지의 손을 장애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손은 남들과 조금 다를뿐 생활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아버지의 손을 장애로 인식한건 대학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처음 장애인 수첩을 만들어 오셨을 때였었다.
내 기억속의 아버지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정직하셨고, 가족과 이웃들에게는 다정다감하셨다. 언제나 당당하셨고 책임감이 강하셨으면 언제나 가족을 많이 사랑한 따뜻한 분이셨다.
그렇게 건강하고 무쇠같던 아버지가 어느 날 1주일을 심하게 앓으셨다. 처음엔 두통이 심해진 줄 알았다. 병원대신 약국에서 약만 먹고 쉬셨는데 삼촌이 병문안을 온날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다. 그날밤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가는 길이 불길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의식은 돌아왔지만, 나의 불길함은 적중했다.
아버지는 폐암 4기에 뇌암 3기 진단을 받았으셨다. 삶의 의지를 갖고 최선을 다했지만 6개월 투병 마지막 밤에 아버지는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다. 다시 한번 구급차에 실려 한양대학교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흰 가운을 입은 젊은 의사들이 달려들었다. 결말을 예상했던 나는 그들이 아버지를 구경 나온 사람들 같았다. 한바탕 소란끝에 그 사람들을 물리치고 치료실로 갔지만 나의 예상은 또한번 적중했다.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병원을 나오실 수 없었다.
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마련하고 아버지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전문화된 장례식장도, 상조회사도 없었다. 어머니는 앞치마를 메고 육개장을 끓였고, 누나는 회사 동료 분들과 밥을 했다. 나의 학교 선배와 동기들은 음식을 날랐고,
나는 고등학생이던 남동생과 3일 내내 빈소에서 상주자리를 지키며 아버지의 손님들과 슬픔을 나눴다.
많은 분들이 쉴 틈 없이 와주셨고 같이 슬퍼해주셨다. 내게 아버지 장례식은 3일 내내 슬픈 축제와도 같았다.
아버지의 마지막은 행복해 보였다. 너무나 많은 분들이 진정으로 슬퍼해 주셨다.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처럼 살고 싶었다.
"정직하고 당당하고 가족에게 헌신하며, 주변사람들에게 다정다감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면 나의 장례식장도 슬픈 축제의 장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나의 사춘기 시절 고민에 대한 답을 주셨다.
그렇기에 나는 울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