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의 일주일
스톡홀름을 떠나는 날
월요일 아침은 스톡홀름에서 눈을 떴다. 전날 밤 프로그램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려 함께 나흘을 보낸 사람들과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마지막날 같이 숙박을 하기로 한 엘리프와 역에 바로 연결된 호텔로 갔다. 갑작스러운 예약 취소에 원래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당황스러운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호텔 방에 올라와 지난 한 달의 내 여정에 계속되었던 불운을 이야기하며 엘리프와 깔깔대며 웃었다. 엘리프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미안한데, 이거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너무 웃겨."라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함께 웃으면서, 함께 했던 지난 나흘의 여정에서 느낀 것들을 이야기하고 또 공감하면서, 그렇게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 나보다 비행기 시간이 빨라 먼저 출발해야 했던 엘리프와 잠결에 비몽사몽 포옹을 하고 인사를 나눴다.
스톡홀름에서 암스테르담을 거쳐 인천으로 돌아오는 여정은 경유시간을 포함하면 총 20시간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공항 밖으로 나가 중앙역 인근을 좀 걸었는데, 5년 전 이곳에 함께 왔던 친구들이 떠올라 뭉클하기도 했다.
여행 후 몸과 마음
그렇게 긴 여정을 마치고 한국에 도착했는데 몸과 마음이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보다. 일단 시차적응에 실패했다. 새벽에 눈이 떠져 잠을 이루지 못해 몇 시간 잠을 못 자고 출근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오기 전에 미끄러져 다쳤던 무릎의 상처는 나아가는 중이지만 통증은 남아있었다.
여행 다녀온 산더미 같은 짐들을 정리하고, 집을 치우고, 비어 있는 냉장고를 다시 채워 넣고 요리를 했다. 여권을 새로 만들어야 해서 새로 사진을 찍고, 구청에서 여권을 신청하고 왔고, 다음 주에 있을 또 다른 출국을 준비를 하느라 이런저런 일들을 하는 와중에도 마음은 저 아래로 자꾸 가라앉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함일까.
나의 여정이 어땠는지 이야기가 듣고 싶다는 연락이, 아니면 스웨덴에서 만난 인연들이 화상으로 얼굴 보며 업데이트를 하자거나, 혹은 오래전 직장 선배에게 몇 년 만에 생각이 났다며 긴 통화를 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기도 했다. 마지막에 참여했던 프로그램의 피드백을 해야 한다거나, 다른 참여자들이 열정적으로 SNS에 후기 포스팅을 올리는 것도 보였지만 나는 그중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여행의 후유증이라는 것이 한참 후에서야 떠올랐다. 너무도 새로운 것들이 많이 들어와서 충분히 소화시킬 시간이 부족했던 걸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깊은 연결이 일어났고, 감동적인 순간이 참 많았는데 온 마음을 다해 듣다 보니 에너지를 다 써버린 것일까. 아니면 매번 다른 환경에 적응하면서 썼던 에너지를 충전할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일 년 만에 P와의 만남
그 어떤 만남과 연락에도 응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아 양해를 구했지만, 한국에 오기 전부터 약속이 되어있던 P와 잠시 만났다. 디지털 노마드인 영국친구 P는 한국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이제 막 떠나려는 참이라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는데 마침 내가 들어오고, P가 떠나는 사이 며칠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로 P의 한국 생활 이야기를 듣고, 어디에 다녀왔는지 P의 추천리스트와 고기를 먹지 않는 P가 매 끼니 겪었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나눴다. (마침 우리는 김밥을 시켰는데 안에 햄이 있었다.) 그래도 가을이 좋아 이 시기에 또 한국에 돌아온 P가 한국의 가을을 만끽하고 가게 되어 다행이다.
한국에서 다시 맞이하는 가을
그러고 보니 한 달 사이 계절을 꽤 많이 오갔다. 10월에 도착한 스웨덴은 단풍이 짙게 물든 가을날이었지만 날은 쌀쌀해 겨울 코트를 입고 다녔다. 이탈리아는 이상하리만치 더워서 최고기온은 20도가 넘어 반팔을 입고 다녀도 되는 날씨였고, 다시 돌아간 스웨덴은 정말 겨울이 와있었다. 4시면 깜깜해져서 늦은 오후에도 밖에 돌아다닐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던 스웨덴의 겨울을 지나, 한국에서는 다시 가을을 맞이했다. 산책을 하며 붉게 물든 단풍을 오래 눈에 담았다.
한 달 사이 여러 나라와 사람들과 계절을 오갔던 나에게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침전하는 것 같은 마음도, 서서히 올라오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