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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생각의 틈

계획만 세워도 만족하는 우리의 뇌

관찰 경제 속 아는 것과 행동 하는 것 사이의 틈

by 서소헌

시간이 있을 때면 밀프렙이나 청소 루틴, 집안 정리 콘텐츠를 보며 쉼을 얻고는 합니다. 쉼을 얻는다는 표현이 다소 과장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제 현실의 부산한 주방과 대비되는 영상 속 질서정연한 공간들이 주는 안정감은 실재합니다. 깔끔하게 나열된 유리 용기들 속 컬러풀한 채소들, 체계적으로 정리된 냉장고, 한 번에 일주일치 식사가 완성되는 그 효율성. 어지럽게 흩어진 일상 속에서 이런 완벽한 시스템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생기와 상쾌함이 돌아옵니다.


특히 바쁜 하루하루 속에서 맛있고, 건강한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이 늘 존재하는데, 단 2시간 만에 일주일치 식사의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밀프렙 영상은 마치 '세상에는 해결책이 있어'라고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온전히 정돈되고 계획된 삶의 한 단면을 보며,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통제감을 얻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밀프렙 영상 한 편을 본 후에는 마치 이미 건강한 일주일을 위한 준비를 마친 것 같은 묘한 만족감이 찾아옵니다.그리고 매번 "이번 주말에는 꼭 해봐야지!"라고 다짐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만족스러운 감정과 다짐이 실제 밀프렙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영상을 보는 시간만큼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면 지금쯤 저 는 밀프렙 마스터가 되었을 텐데 말이지요.흥미롭게도 이런 패턴은 저만의 특징이 아닌 듯합니다. 저의 중학생 딸 아이를 지켜봐도 비슷한 모습이 보입니다. 노트 정리법, 과목별 공부법 영상을 시간 날 때마다 애청하는 아이는 다양한 학습 전략을 찾아보며 희열을 느끼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잠이 듭니다 :)


운동 영상을 보며 "내일부터 시작해야지", DIY 가구 만들기 영상을 보며 "나도 한번 도전해볼까", 여행 브이로그를 보며 "다음 휴가에는 저기 가야지"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이지요. 보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의 이 미묘한 간극은 왜 생기는 걸까요? 경영학자 제프리 피퍼와 로버트 서튼은 이런 현상을 "Knowing-doing gap(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간극)"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미묘한 간극이라 했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바다와 같다' 라고 표현되고 합니다. 그 간극이 바다와 같다니요!! 그리고 이러한 간극은 유튜브로 대변되는 관찰 경제속 에서 점점 가속화 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보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의 뇌는 실행과 계획을 혼동합니다

놀랍게도 우리의 뇌는 계획을 세울 때와 실제 행동을 할 때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합니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미래 행동을 상상할 때 활성화되는 신경 경로가 실제 행동을 할 때와 상당 부분 겹친다고 합니다.

즉, 밀프렙을 만들어 보겠다고 계획하는 순간, 뇌는 이미 어느 정도 행동한 것처럼 착각해 버리는 것이지요. 회의에서 열띤 토론을 나누고 나면,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의 뇌는 계획과 실행을 혼동하고, 계획 자체에서 성취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제 머릿속에서는 이미 밀프렙을 만들었고, 운동을 시작했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행동할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Knowing-doing gap"의 신경학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퍼와 서튼이 그들의 책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종종 알고 있는 것을 실행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계획 수립'이 '실행'과 같은 만족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즉각적인 보상 vs. 지연된 보상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영상을 소비하게 될까요? 이는 '보상 체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밀프렙 영상을 시청하는 것은 즉각적인 보상입니다. 손가락 하나로 얻는 정보와 재미, 그리고 대리만족이지요. 영상 속 인플루언서가 일주일치 식사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곧 저렇게 될 거야"라는 희망을 얻습니다.


반면 실제 밀프렙을 하려면 해야할 일이 너무 많지요. 일주일치 식단을 계획해야 하고, 장을 보러 가야 하고, 2시간 이상 요리해야 하며, 설거지와 정리를 해야 합니다. 결국 보상은 한참 뒤에야 받을 수 있지요.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를 '현재 편향(present bias)'이라 부릅니다. 인간의 뇌는 진화적으로 미래의 불확실한 큰 보상보다 지금 당장의 확실한 작은 보상에 더 강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수만 년 전 사바나에서는 지금 당장 먹을 열매를 포기하고 더 큰 사냥감을 기다리는 것이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즉각적 보상 선호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간극'을 더 넓히는 첫 번째 요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또 다른 흥미로운 신경학적 현상이 더해집니다.


대리 경험의 착각

더 흥미로운 것은 우리 뇌의 '거울 뉴런(mirror neuron)' 시스템입니다. 다른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관찰할 때 우리 뇌 속에서는 마치 우리가 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비슷한 신경 회로가 활성화됩니다.

유튜버가 주말 단 2시간 만에 칸칸이 나뉜 예쁜 용기에 다양한 채소와 단백질, 건강한 탄수화물을 담아 일주일치 식사를 완성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 뇌는 실제로 그 행동을 한 것과 유사한 보상 신호를 받습니다. "그래, 나도 건강한 식습관을 만들고 있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지요. 그래서 영상을 본 후에는 "뭔가 했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실제 행동의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청소 루틴이나 정리 영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공간을 보며 뇌는 마치 우리의 공간도 정리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고, 그 결과 실제로 정리정돈을 시작할 동기가 줄어듭니다.

즉각적인 보상과 대리 경험이 우리를 행동하지 않게 만드는 내적 요인이라면, 외부 환경에도 우리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실행 마찰의 벽

계획과 실행 사이에는 '실행 마찰(friction)'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합니다. 밀프렙을 만들기 위해 어떤 식단을 짤지, 재료를 선택할지 결정하고, 배송을 기다리고, 냉장고에서 꺼내고, 조리하고, 설거지하는 과정이 그러합니다. 각 단계마다 작은 마찰이 쌓여 결국 큰 장벽이 되는 것이지요.

반면 유튜브 영상을 보는 데는 거의 마찰이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켜고 앱을 누르기만 하면 됩니다. 실행 마찰이 적을수록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기업들의 영리한 활용

우리 내부에는 보는 것을 실행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있고, 동시에 실행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기업들은 이 심리적 특성을 자신들의 비즈니스 모델에 영리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콘텐츠 플랫폼(유튜브, 넷플릭스 등)은 '관찰 경제'를 촉진합니다. 자동 재생, 무한 스크롤, 개인화된 추천 - 이 모든 기능은 우리의 대리 만족 메커니즘과 즉각적 보상 선호를 자극하여 계속해서 콘텐츠를 소비하게 만듭니다. 반면 이커머스 기업(아마존, 쿠팡 등)은 '실행 마찰'을 줄이는 데 집중합니다. 원클릭 주문, 빠른 배송, 간편 결제는 모두 우리가 행동으로 쉽게 옮길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유튜브는 우리가 영상을 더 많이 보게 하고, 아마존은 우리가 더 쉽게 구매하게 만듭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간극을 좁히려면...?

이제 내 머릿속의 트릭도 알고, 기업들의 영리한 전략도 파악했으니... 이 게임의 룰을 내 편으로 바꿔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를 위해 우리는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 주요 장애물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 즉각적 보상 선호: 우리 뇌는 미래의 큰 보상보다 당장의 작은 보상에 끌립니다. 영상 시청이 주는 즉각적 만족감이 실제 행동의 지연된 보상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둘째, 대리 경험의 착각: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뇌는 마치 자신이 그 행동을 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밀프렙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식습관을 실천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죠.

셋째, 실행 마찰의 벽: 계획에서 실행으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수많은 작은 단계들이 있습니다. 이 단계들이 모여 넘기 어려운 장벽이 됩니다.


"Knowing-doing gap"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피퍼와 서튼의 연구에 따르면, 이 간극을 성공적으로 줄인 조직들은 지식을 행동으로 전환하는 구체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개인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실행을 미루는 게 아니라, 이미 실행한 것처럼 느끼며 안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밀프렙 영상을 한 시간 보고 나면 마치 건강한 식습관을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계획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착각한 적, 여러분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인지적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자신만의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그 첫 걸음은 자기 성찰에서 시작됩니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의 틈을 좁히고 싶으시다면, 우리 함께 다음의 질문들을 통해 자신의 패턴을 살펴볼까요?



1.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계획을 세우는 것' 만으로도 '실행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계시나요?

2. 계획을 하며 실행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나의 영역 중 가장 행동으로 옮겨가고 싶은 영역은 무엇인가요?

3. 실제 행동과 단순한 관찰 사이의 착각을 우리는 어떻게 더 분명히 인식하고, 바로 잡을 수 있을까요?

4. 내가 취하고 있는 즉각적인 보상은 무엇이며, 실질적으로 성취해야 할, 그러나 미루고 있는 미래 보상은 무엇인가요?

5. 나의 관찰과 실행 사이에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10% 줄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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