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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생각의 틈

일본 해커톤에서 경험한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리더의 전공필수과목

by Gemma Han

3개월 전, 12월임에도 은행잎이 노오란 빛을 뽐내던 일본 도쿄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창업가, 예비창업가들을 대상으로 열린 이틀 간의 해커톤에 팀코치로 참여하게 된 것이었는데요.

떠나기 전까지 가장 고민이었던 것은 '외국어인 일본어를 어떻게 잘 구사할 수 있을지'였지만 막상 가서 경험하게 된 가장 큰 도전은 일본인들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그 뒤에 깔려있는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어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밝혀두자면, 저는 일본에서 돈을 벌며 생활을 한 적도 있고, 한국에서는 일본의 대기업과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TF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인들의 커뮤니케이션 특성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며칠 간 경험한 것은 또다른 통찰을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경험했고 알고 있던 것은 '외국인(인 나)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커뮤니케이션 특성의 일부였을 뿐 일본인들끼리 모여있는 팀에서의 역동을 관찰하게 된 것은 처음 있던 일이었으니까요.


KakaoTalk_20250313_134914262.jpg 아름답던 12월의 도쿄, 긴자의 워크숍 현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첫 날, 해커톤이 시작되고 주제가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겪는 사회 문제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한 솔루션을 포함한 MVP를 만들어 피칭하는 것이 이틀 간 팀에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순조롭게 팀빌딩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코칭하는 팀이 의사결정이 조금씩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선은 서두르기보다는 기다려주고 팀원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정의>하는 단계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각자 겪고 있거나 관심이 있는 사회 문제를 하나씩 픽업해서 소개하고 이 중 하나의 문제를 정해야 했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서로를 향해 끄덕여주고만 있는 팀원들을 발견했습니다.


1. 조화(和): 의사결정을 늦추는 경청

일본요리를 和食라고 할 만큼 和(わ・wa)라는 것은 일본문화를 대표하는 키워드입니다.

일본 팀은 모든 팀원이 서로의 의견을 신중하게 경청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경청만 하느라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누구도 강하게 주장하지 않다 보니 팀의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팀원들 모두 자신의 아이디어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화롭고 싶지만 조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이를 객관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의사결정매트릭스를 활용해보기로 했습니다. 그중 ST 매트릭스(Seriousness & Timeliness Matrix)를 통해 아이디어의 심각성(Seriousness)과 시의성(Timeliness)을 점수화하여 시각적으로 정리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림1.png 옹기종기

세 명!이 본인이 가진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가장 시급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나머지 세 명에게 감사한 순간) 이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한 순간, 수치화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세 개의 문제를 숫자로 나타내 보았죠.


그 결과, '신주쿠역 내에서 길을 잃는 이용객' 문제가 가장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로 도출되었습니다. 수치화를 해 보니 신주쿠역은 출구 갯수만 해도 150개가 넘고, 하루 이용객이 350만 명에 달합니다. 이 문제가 S(심각성)와 T(시의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고, 자연스럽게 논의의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단순한 경청에서 벗어나 데이터를 활용한 의사결정 방식이 팀의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2. 체면(面子): 리더의 체면 절대 지켜

문제는, <신주쿠역 문제>가 팀 내 가장 나이가 많던 리더의 아이디어가 아닌 대학생 참가자의 아이디어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가장 권위가 높은 사람의 아이디어를 kill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었죠. 아니나다를까 리더는 본인의 아이디어를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주쿠역>에 대해 리서치를 해야 할 시간에 양쪽에 있는 팀원들에게 본인의 아이디어가 가진 심각성과 시의성을 어필하고 있었고 그들도 다시 경청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멘츠(체면)' 문화와 관련이 깊었습니다. 특히, 경험이 많은 리더일수록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고, 팀원들도 이를 존중하느라 논의를 조정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는 의사결정 방식의 다양한 옵션을 소개하며 넛지를 주었습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결과물을 도출해야 했기에, 리더와 팀원들은 스스로 투표(voting)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팀이 가장 선호하는 방향은 무엇일까요? 각자 선호하는 아이디어에 투표해볼까요?"

이렇게 다수결을 통해 의견을 정리하자, 리더의 생각에 반대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고, 결정 과정이 보다 민주적이고 유연해졌습니다. 팀원들의 공통된 생각을 확인한 리더도 비로소 본인의 아이디어를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결코 다수결이 정답은 아닙니다. 실제 창업팀에게는 강한 리더십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워크숍처럼 제한된 시간 내에 빠르게 MVP를 만들어야 하는 환경에서는 팀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하나가 된 팀이 솔루션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3. 사양(遠慮): 질문하지 않는 팀

질문을 꺼리는 것은 비단 일본만의 특징은 아닐 것입니다. 무지의 반영처럼 느껴져서 질문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워크숍 참가자들에게도 많이 보이는 특징이니까요. 하지만 일본인들이 질문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도 스스로 해결하려 하거나, 질문 없이 논의를 이어가는 모습에는 일본의 '엔료(遠慮)' 문화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코치의 '폐를 끼칠까', '시간을 뺏는 것일까', '부담을 줄까'하여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는 의도적으로 쉬는 시간에 팀원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이 해커톤은 어떤 경로로 참여하셨나요', '긴자까지는 전철로 오셨나요', '아침은 드시고 오셨나요' 등 일상적이고 가벼운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이에 답하며 코치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그들도 비로소 제게 질문이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코치님은 어쩌다 일본어를 하게 되셨나요?" "한국에서는 보통 코칭을 어떻게 하나요?"

이런 소소하지만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조금씩 팀원 개개인과의 관계가 가까워졌고, 이후 팀원들은 워크숍 도중에도 자연스럽게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코칭에 있어서의 라포Rapport의 중요성을 제가 너무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죠. 코치에게는 어떤 것을 질문해도 괜찮다, 폐를 끼치거나 부담을 주는 것이 결코 아닌 즐거운 대화의 일부이다, 라는 사인을 주며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을 주려고 노력하자 팀은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솔루션이 논의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 가지 문화적 특징들은 의사결정 속도, 팀 내 발언 구조, 그리고 코칭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를 통해, 코치로서 FT로서 나아가 스타트업 리더들이 조직 내 다양한 사고방식을 조율하는 방법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팀빌딩도 이문화 그 자체니까요)


KakaoTalk_20250313_135036091_01.jpg 아름답던 일몰과 스카이트리!



그리고, 강점

이틀 간의 해커톤 내내 조용했던 팀원이 있었습니다. (N군이라고 하겠습니다) N군은 이제 갓 스무살이 된 대학생이었는데,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고 메모만 하고 있었습니다. 팀코치로서 걱정이 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여기까지 와서 워크숍의 역동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다가가서 말을 건넸습니다.

"N군은 경청을 잘하는 사람이네요. 이틀 동안 무언가를 적고 있던데 팀원들의 의견을 들으며 정리되는 부분이 있을까요? 이제 솔루션이 나와야 하는 단계니까요"

여전히 옅은 미소와 '글쎄요. 몇 가지 떠오르기는 하는데 조금 더 리서치를 해보고 싶네요'라고 답하던 N군의 노트는 놀랍도록 잘 정리되어 있었고 그곳에 과연 단서가 있었습니다.

결국 솔루션은 N군에게서 나왔습니다. 최종 피칭 때 모두에게 가장 반응이 좋았던 것도 하이브리드 솔루션이었던(하이 테크의 측면과 아날로그의 측면을 결합한) N군의 아이디어였고요.

코칭 수련 때 배웠던, 강점을 명확한 언어로 읽어주는 것의 중요성을 현해탄을 넘어서도 새삼스레 깨닫게 된 기억입니다.


우리와 다른 듯 한편으로는 비슷한,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제가 겪고 온 고군분투가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미로 읽히시나요?


리더를 위한 3가지 질문

스타트업에서도 우리는 종종 팀원들이 기대만큼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거나, 의사결정이 늦어지는 상황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게으름이나 무관심 때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팀원은 조화를 중시하느라 논의를 길게 이어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팀원은 리더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반대 의견을 피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팀원은 질문하는 것이 리더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 기준, 나의 문화의 기준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놓인 문화적 맥락이나 기질, 사고방식과 우선순위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리더의 역할일 수 있겠습니다. 아롱이 다롱이 모여있는 팀의 다양한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이를 조율하는 역할도 해야겠죠. 이러한 요소들이 갖춰지면,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은 조금 더 나아질 것입니다.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1️⃣ 우리 팀의 의사결정 과정은 객관적이고 효율적인가?
2️⃣ 팀원들이 리더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는 것은 아닌가? 팀 내에서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문화가 조성되어 있는가?
3️⃣ 내 팀원들은 저에게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는가? 심리적 안전감을 느끼고 있는가?


KakaoTalk_20250313_135036091_03.jpg 사진을 보니 생각났습니다. 영어로 커뮤니케이션 해야 하는 팀원도 있었습니다. 이쯤되면 정말이지 일본어를 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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