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 동무들이여, 추억이나 파먹자
나는 35살 아재다. 1984년 12월 19일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해는 갑자년으로 60갑자의 첫해다. 그러니까 쥐띠 중에서도 왕쥐띠, 60년을 주기로 도는 음양오행의 첫 해다. 그리고 더 이상 나이를 물을때 '띠'를 묻지 않는 마지막 세대기도 하다. 어쩌면 민주화와 국제화 시대에 아무 노력도 없이 무임승차(?)했던 첫 세대이기도 하며, IMF라는 자본주의적 국가재난사태를 처음으로 목격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무상은 아니었지만 학교급식을 받아먹은 첫 세대이기도 했으며,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저학력 혹은 단군 이래 최저학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살았던 6차 교육과정 세대였다. "하나"만 잘해도 대학을 갈 수 있다던 당시 교육부의 거짓말을 정면으로 얻어맞고서 몇년간 코마상태에 빠졌던 우울한 트라우마를 간직한 세대기도 하다.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참사까지 굵직굵직한 재난들을 기억하고 있는 세대기도 하다. 내가 어린 시절엔 해괴한 유괴사건들이 왜 그리 많았는지,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되었을 때 그들 또한 내 또래였고, 나와 같은 고향 아이들이었다. 지존파가 인육을 뜯어먹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사회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었고, 당시 따라다니던 키워드는 늘 오렌지족이었다. 강릉에 무장공비가 잠수함을 타고 침투했을때, 혹시나 내 고향 대구에까지 와서 엄마아빠를 죽이면 어떡하지라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했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가수들은 왜 그리 다들 일찍 죽었는지, 나는 아직도 노래방에서 '내 눈물모아'를 부르고 차안에서는 '말하자면' 을 듣는다. 서른이 넘어서야 김광석을 제대로 듣기 시작했지만, 들을때마다 심금을 울린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만든 문화적 아이콘이 절대적인 줄 알고 살았으며, 내 누이들은 H.O.T라도 영원하길 바랐다. 뒤늦게서야 접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남자가 봐도 왜 그리 섹시했던지, 그가 한참전에 죽었다는 사실과 그가 써놓은 유서를 보고서 한동안 멍한 적도 있었다. 발매된지 한참이 지난 메탈리카와 본조비의 음악을 들으며 누가 '진정한 락' 이냐를 두고 친구들과 쉴 새 없이 썰전을 벌이기도 했고, 린킨파크가 나왔을 땐 가히 락의 혁명이라며 함께 좋아했다.
김일성 사망소식이 뉴스를 도배하다가도, 대통령이 처음으로 평양공항에 도착하는 걸 보았고, 두 정상이 악수하는 걸 보았다. 그로부터 1년 뒤, 미국의 쌍둥이 빌딩이 영화처럼 무너지는 장면에 함께 비명을 질렀다. 전세계가 테러와의 전쟁에 화산처럼 들끓었다. 뉴스에는 온통 '테러' 이야기 뿐이었고, 북한 '악의 축' 이 되어 다시 한번 전세계인의 적이 되어 있었다.
수학능력시험은 처음으로 물수능이라는 논란을 얻게 되었고, 만점자만 수십명에 달할 정도로 학력 인플레이션이 성행했다. 다행히도 구타금지시대의 군입대, 하지만 또다른 수많은 의문사들과 총기난사사건으로 부모님의 가슴을 졸였다. 취업에 대한 방황, 각자의 도전보다는 회사를 다니며 정직한 노동을 통해 경제생활을 하는 것이 여전히 마지막 남은 미덕인줄만 알았던 세대. 결혼과 동시에 빚 2억쯤은 떠안고 살아가는 세대. 그래서 이제서야 화장실과 베란다 정도가 내 것이 된 세대.
할아버지는 국가재건과 산업화를 위해, 아버지들은 민주화와 IMF 재기를 위해 살아왔지만, 정작 그의 손주, 자식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세대. 꿈과 장래희망이라고 해봐야 40평짜리 아파트 한채나 로또 당첨이 되어 버린 세대.
먹고 사는 일은 세대와 관계없이 우리를 옥죄는 일이지만, 가는 곳 모르고 정처없이 떠돌땐, 과거를 돌아보며 추억이나 파먹고 살아야지. 그래도 우리 행복했잖아. 그래도 우린 잠깐이지만 삶을 꿈꾸었잖아. 그러니 살다 지치면 가끔 여기에 들러 달고나처럼 달콤했던 옛추억이나 파먹자. 혹시 또 알까, 우리의 기억속에, 추억속에 꿈꾸지 못한 꿈을 다시 꾸게 할 보석이 있을지.
힘내라, 내 동무들이여. 형은 아직도 백수 작가로 살잖니.
당신에게 84년 갑자생, 쥐띠는 어떤 기억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