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를 생각하며 혼자 술을 마신다. 고조된 분위기 속 다 같이 하는 건배도 좋지만 마음속의 그 사람에게 길을 내는 혼자만의 건배를 한다. 그 길은 따스하고 싱그럽고 애잔하기도 하더라.
정말 곱게 늙은 그녀는 인사드리는 나에게 수줍은 듯 고개 숙인다. 자그마한 체구이고 동그란 얼굴은 천진하게 밝은데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먹고 입는 것에도 도움을 받아야하는 그녀는 요양병원에 오신지 일년, 알츠하이머치매는 그녀에게서 육십년의 시간을 앗아갔다. 자신을 열여덟 소녀로 여기며 자식과 손자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시간 뿐 아니라 미련과 집착마저 가져간 것은 다행인가. 가족이 보고 싶다고 투정부리지 않고 집에 가야 한다고 조르지 않는다. 어릴 적 기억으로 살며 가끔 그 때의 부모님과 형제를 말 할 뿐이다. 퇴색된 그림을 보듯 아스라이. 항상 해맑은 미소를 보이니 '아기할머니' 라 불리며 사랑 받는다.
어느 할아버지를 좋아하여 그 분 옆에만 계시려 한다. 좋아하시느냐 물으면 수줍어하신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렇게 그대로이다. 인지기능이 와해되면 목적을 위한 부차적 행동을 못하는 수행불능증이 된다. 진행될 수 없는 사랑은 인형처럼 서 있다. 계속 엄마의 지워진 기억을 다시 그리려는 아들과 딸에게 엄마, 아빠라 부르며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애기할머니, 전 당신의 퇴색한 그림의 사연이 궁금합니다. 당신의 오래된 사랑과 새로운 사랑을 위해, 잊혀 졌지만 없어지지 않은 치매노인들의 그 사랑을 위해 잔을 비우겠습니다.
친구야, 이제 난 집이다. 유리 너머의 너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 감추려 애썼구나. 아버지와 기업을 하다 부도의 책임을 혼자 지고 영어의 몸이 된 너. 부러울 것 없던 생활에서 2.5평 쪽방에 구속되어 내일을 알 수 없어진 친구의 삶에 난 망연자실했어. 마음이 잠기는 것을 서로 보이지 않으려 했지. 규칙적인 생활과 금주, 금연이니 건강을 되찾는 기회라며 웃는 너. 과로와 술이 사라진 얼굴은 좋았어, 머리는 하얗게 세어버렸지만. 딸과 아들을 볼 수가 없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일게다. 아이들은 아빠가 출장을 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었지. 판결이 날 때까지는 잡범들과 구치소에서 같이 지내야 하더구나. 그 방에서 3명과 함께. 과자를 좋아하지 않는 네가 간식을 사오면 좋겠다는 것을 듣고 같이 있는 이들이 너무 곤란한 사람들이 아니길 바란다.
'친구의 아침' 이란 가요는 요즘 애청곡이 되었단다. 친구야, 그 노래가사로 건배사를 하련다.
'우리는 달려왔지 그저 최선을 다해. 돌아 볼 여유도 없이 모든 걸 던진 채. 우리가 슬플 땐 쉬기로 해 잠시. 일어날 땐 또 다른 시작이 있어. 찬란한 태양이 밤을 지나올 때. 너의 아침은 벌써 저기에.' 자, 너의 새로운 아침을 위해, 건배를.
이 시간 삼경, 그대는 독서를 하고 있었을까, 잠이 쉬이 들지 않아 편지를 쓰고 있었을까? ‘군약신강’의 시대에 피 마르는 노론과의 정쟁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정조 대왕. 학문은 신하를 앞서고 무예에 통달하고 백성을 사랑한 ‘상 남자 이 산’.
혈기 뜨거운 젊은 남자의 사랑은 어떠했을까. 정략 결혼한 정비인 효의왕후와는 후사가 없어 후궁을 들였다. 그녀들이 요절을 계속 하여 한명씩의 후궁을 맞았지 여러 명의 후궁을 두지 않았다. 역시 학문을 좋아했던 세종도 8명의 후궁들을 둔 것에 비하면 여색을 멀리한 것이다. 그런 그가 15년간 짝사랑한 여인이 있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 집안 청지기의 딸이 10실에 궁녀로 들어왔는데 소년 이 산은 이 여식을 좋아하여 학문을 가르치며 사랑을 키웠다. 그녀가 15세 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한다. 포기하지 못한 이산은 계속 구애를 하여 그녀가 30세가 되어서야 결실을 이룬다. 세 번째 후궁인 의빈성씨이다. 어렵게 얻은 아들은 세자가 되지만 5살에 죽고 상심하던 의빈성씨도 뒤따라 이산의 곁을 떠난다. 그녀에게, "살아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 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라고 쓴 그대의 편지에 드리운 깊은 슬픔…….
지엄한 왕세자, 왕인데 15년을 애 태우고 5년을 같이 하다 모두 잃어버린 사랑은 그대를 서서히 죽어가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치열한 자기성찰과 고뇌를 하는 삶을 생각할 때 항상 떠오르는 그대여, 부디 지금 올리는 한 잔의 따스한 술이 그대의 아픈 사랑에 위로가 되기를.
그대가 이혼을 결심했을 때 말렸었지요. 지금 두 사람이 서로를 보기 힘들어하는 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기에. 사랑의 결실이었던 아이를 잃은 후 그 상실감은 모든 것을 삼켜버려 두 사람은 영혼이 없는 껍데기로 지내왔습니다. 그래도 남은 슬픔은 지독하여 자신과 분신 같은 옆 사람을 학대하였죠. 서로의 깊은 상처가 분명히 보이면서도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상대를 얼리는 고문을 계속 했던 거지요. 그리고는 이혼을 하여 밀쳐내더군요. 헤어진 후에도 두 사람은 아들의 기일 뿐 아니라 지인들의 모임에서 보며 서로의 주위를 맴돌았지요. 옛사랑의 새로운 출발을 빌어주고 다른 만남을 시작하여 잘 되는 듯 했으나 어떤 힘이 뒤에서 잡아당기듯 주저앉기를 반복했지요.
‘연애시대’란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이런 독백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그대와 비슷한 고통을 겪었군요. "사랑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 사랑을 시작할 때는 희망과 두려움이 뒤엉켜 아프고, 사랑한 후에는 그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알고 싶어서 부대 켜서 아프고, 사랑이 끝날 때에는 그 끝이 같지 않아서 상처 받는다. 사랑 때문에 달콤한 것은 언제일까. 그리하며 사랑은 늘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그렇게 서로에게서 더 멀리 달아나지 못하다 다시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둘을 같이 알던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요. 이제는 설레지는 않는다고 고민하셨죠.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견디어 온 그대들의 사랑은 꿈꾸고 두근거리고 아프고 두려움까지 다 맛보고 있는 그런 사랑이군요. 깊은 사랑이란 떠나버리지 못하고 상대가 행복하기를 기도하면서 깊어져버린 사랑이 아닐까요? 두 사람의 오래 갈 사랑을 위해 잔을 들겠습니다.
오래된 사랑은 잊히는 것이 슬프고 새로운 사랑은 그 끝이 두렵다. 언제나 사람이 문제이고 사랑의 문제이다. 내어주기만 해야 하고 지켜보기만 해야 하며 그 끝을 알더라도 사랑은 기어이 우리에게 스며들고 가득하고 만다. 아~ 이 모든 사랑을 위하여 축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