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배터리데이 리뷰 1편
한국 시간으로 2020년 9월 22일 새벽 5시 30분, 테슬라 팬이라면 장장 6개월 넘게 기다려왔을 ‘배터리 데이(Battery Day)’ 행사가 드디어 열렸다.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에 대한 테슬라의 미래 비전과 로드맵을 제시하는 행사였다. 이번 배터리 데이는 원래 연초 개최 예정인 행사였으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반 년이나 지연돼 가을에 와서야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고, 그 기대가 주가에 반영되어 이 기간 동안 테슬라의 주가는 무려 5배 이상 상승했다. 하지만, 행사가 개최된 당일, 주가는 오히려 5% 이상 하락했고 행사 내용이 기대보다 별 볼 것 없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전고체 배터리와 같이 기존의 업계를 재편할 놀라운 혁신이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배터리 데이는 정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행사였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일론 머스크가 제시한 청사진에 대한 구체적인 달성 로드맵을 제시한 ‘풍족한 행사’였다고 본다. 2003년 테슬라가 창립된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기꾼, 몽상가라 불렀다. 비전만 장대할 뿐,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는 이러한 부정적 예상을 깨고 그가 세운 마스터 플랜을 하나하나 달성해왔다. 이번 배터리 데이 행사에서 그는 2022년까지 100GWh, 2030년까지 3000GWh의 배터리를 자체 생산하겠다는 원대한 비전을 또 한 번 내놨다. 100GWh면 현재 EV 배터리 업계 1위라는 LG화학의 생산 캐파와 비슷한 수준이니, 놀라울 따름이다. 또한 이런 자체 생산을 통해 배터리원가($/KWh)를 무려 56%나 절감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더 인상적인 포인트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5가지의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번 배터리 데이 행사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번 행사에서 일론 머스크는 그동안 무성했던 루머들을 하나 하나 공식화하며, 그가 ‘원대한 비전’ 뿐 아니라 이를 달성할 ‘현실적인 계획’을 갖고 있음을 대중에 공개했다. 이 계획들이 어떤 내용과 의미를 갖고 있는지 하나씩 리뷰해보려 한다. 첫번째 순서는 테슬라가 사용해온 원통형 배터리의 새로운 폼 팩터(Form Factor), 46800 배터리이다.
먼저, 대중에게 아직 익숙치 않은 원통형 배터리에 대해서부터 알아보자. 테슬라가 전기자동차의 동력으로 사용한다는 원통형 배터리란 무엇인가?
원통형 배터리는 말그대로 원통 모양의 배터리를 말한다. 2차전지의 다른 2종류인 폴리머(=파우치), 각형 배터리와 구분되는 원통형의 가장 큰 특징은, 규격이 표준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전세계에서 사용되는 원통형 배터리의 대부분은 18650과 21700 두 종류이다. 폴리머, 각형 배터리는 노트북, 파우치, 자동차(구세대 EV) 등 최종 제품 제조사의 요구에 맞는 다양한 규격으로 제작된다. 특히 폴리머 배터리는 플라스틱 성분의 파우치 케이스로 이뤄져 있기에, 형태를 비교적 자유롭게 변형 가능하다. 고객이 40 x 50 x 60 (가로 x 세로 x 높이)의 공간에 맞는 배터리를 만들어오라는 요구를 해오면, 배터리 제조사가 여기에 맞는 사이즈의 배터리를 개발해 판매할 수 있다. 하지만 규격이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원통형 배터리라면 이런 요구가 불가능하다. 어떤 고객이든 18650 혹은 21700을 구매해야만 한다. 여기서 18은 원형 단면의 지름, 65는 높이를 뜻한다. (마지막 5번째 자리로 0이 붙는 이유에 대해선 명확한 유래가 없으나, 원통형이라는 형태를 글자로 전달하기 위해 0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원통형 배터리는 현재 테슬라 자동차에 들어가는 배터리로 유명하지만,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노트북과 같은 IT제품에 주로 사용되어 왔다. 18650이란 크기 역시 원래 캠코더에 사용되던 규격이 일본 가전업체에 의해 표준화된 것이다. 원통형이 처음 개발된 90년대의 주 사용처가 캠코더였기 때문이다. 이후 원통형 배터리는 각종 IT 제품 뿐 아니라 청소기, 전기차 등 다양한 분야에 사용되기 시작하며 폭발적으로 수요가 증가했고, 2020년 현재 시장 규모가 연간 약 50억 셀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테슬라는 왜 폴리머, 각형을 두고 하필이면 노트북에 쓰이던 원통형 배터리를 선택한 것일까? 일론 머스크가 직접 설명한 적은 없지만 중론은 이렇다. 2000년대 중반, 이름 없는 스타트업이었던 테슬라에게 배터리 조달의 가장 큰 선택 기준은 1) 수급 안정성과 2) 가격이었다.
1) 수급 안정성: 시장 형성기에 머무르던 폴리머, 각형 배터리와 달리 원통형 배터리는 시장이 충분히 개화해 노트북용으로 대량 생산되고 있었다. 때문에 전기차 판매가 급성장하더라도 수급 불안에 대한 우려를 줄이고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2) 가격: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폴리머/각형은 맞춤형 제품이다. 때문에 일개 이름 없는 스타트업인 테슬라가 대형 배터리 제조사로부터 맞춤형 제품을 공급받을 시에는 자칫 가격 협상에서 열위에 놓일 수 있다. 반면 원통형은 표준화돼있어 타 제조사로의 전환비용이 낮아 테슬라가 상대적 우위에 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46800 배터리의 특징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크기가 크다는 것이다. 기존 21700 배터리에서 지름은 21 -> 46mm로, 높이는 70 -> 80mm로 커지면서, 부피 역시 2.5배 가량 늘어났다. 동시에 에너지 밀도는 5배, 출력은 6배 늘리고, 46800 배터리를 사용한 주행거리 역시 16% 가량 늘리겠다는 것이 테슬라의 계획이다. 배터리의 크기를 키우면 성능은 좋아지고 생산원가가 저렴해지는 것은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왜 기존 배터리 제조업체들은 이런 대형화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일까? 원인은 안전과 성능에 있다. 배터리 크기가 커지면 내부에서 더 많은 열이 발생하고, 열은 표면을 통해 외부로 적절히 배출돼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내부의 열과 압력이 상승하다 일정 수준에 다다랐을 때 폭발해버리고 만다. 때문에 열이 적절히 배출될 수 있도록 최소한 부피가 커지는 만큼 단면적도 커져야만 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다. 아래의 간단한 도식도를 보면, 정육면체의 직경이 1cm -> 2cm로 2배 늘어날 때, 부피는 8배가 늘어나지만 단면적 증가분은 4배에 불과하다. 자연히 더 많은 열이 배출되지 못하고 갇힐 수밖에 없고, 과도한 열로 인해 폭발 위험은 커지고 출력은 떨어지게 된다.
이런 문제를 테슬라는 어떻게 해결하려는 것일까? 열을 밖으로 배출시킬 수 없다면, 근본적으로 발생하는 열의 양 자체를 줄이겠다는 것이 일론 머스크의 계획이다. 46800 배터리와 함께 배터리 데이에선 ‘탭리스(Tabless) 배터리’에 대한 생산 계획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탭(Tab)이란, ‘배터리 내부의 전자가 외부의 전력 공급장치를 오고 가는 이동 통로’를 말한다(아래 그림 참조). 배터리의 기능을 위해선 불가피한 부품이지만, 탭의 존재로 인해 내부 저항이 커져 배터리 안에서 더 많은 열이 발생하게 된다. 때문에 이 탭을 제거해 저항을 줄임으로써 열 발생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원통형 배터리의 대형화나 탭리스 배터리는 테슬라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다. 많은 배터리 제조사들이 이미 일찍이 연구하고 검토해온 기술들이다. 때문에 46800 배터리의 양산 성공 여부는 어디까지나 테슬라의 ‘실행 능력’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 한 번도 배터리 대량 생산 경험이 없는 테슬라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한다면 원통형 배터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울 것이다. 실패한다면, 모델3의 대량 생산 과정에서 겪은 ‘생산 지옥(Production Hell)’을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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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소형 리튬이온 배터리의 역사 (이코노믹 리뷰, 2019)
- Tesla unveils new 4680 battery cell: bigger, 6x power, and 5x energy (Electrek, 2020)
- Everything You Need To Know About Tesla’s New 4680 Battery Cell (Clean Technica, 2020)
- Tesla debuts new 4680 battery cell: 500% more energy, 6X power, range increase (Teslarati, 2020)
- [최원석의 디코드] 배터리데이에서 당신이 정말 알아야 할 것들 (조선일보,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