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꿈꾸어도 잠들지 않았던 박제가의 꿈

"우리는 왜 가난한가?"를 묻고 대답했던 《북학의》

by 북청로 로데


'우리에게 진정으로 충격적인 사건은 동결된 백 년이 아니라 그 후에 시간이 다시 흘렀다는 것이다. 그걸 알았다면 백 년을 지혜롭게 썼을 텐데 대부분 '이게 진짜야?' 하는 마음으로 탕진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이다.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시간의 역습, 백 년간 저질러놓은 수많은 일들......'

- 김성중의 소설 《이슬라》 -


김성중의 소설 <이슬라>에서 세상은 갑자기 멈춰버렸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렇게 백 년이 지나자, 멈춰 있으리라 믿었던 시간이 거짓말처럼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소설 속 사람들은 '정지'되었던 백 년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게 진짜야?'라며 세월을 탕진하면서 보냈다는 사실에 다시 충격을 받습니다.

《북학의》가 세상에 나온지 2백 년이 넘는 시간 속으로 거슬러 가보니 박제가는 할 만큼 최선을 다했고 그의 역할이 그곳에서 멈추긴 했지만, 내가 그가 되어 이곳에서 일어나는 삶의 문제들을 고민하고 꿈꿔도 되겠다고 생각해봤습니다. 시간은 사람이 사라진다 해서 끊어지지 않고 오히려 단단해져 내일로서 오고 있으니까요.



"그는 농사와 누에치기. 목축. 성곽. 궁실. 배와 수레에서부터 대자리. 붓. 자 등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눈으로 계산하고 마음속으로 비교해 보았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으면 남에게 묻고, 마음속으로도 미진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남에게 배웠다.”

-인용. 신축년(1781년. 정조 5) 연암 박지원-

박제가와 막역한 사이로 그를 향해 자신의 재능을 낮추어 평가하는 점을 나무라며 더욱 학문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던 박지원의 글이 《북학의》 서문에 등장한다.

박제가는 정조 3년(1779년)에 서얼들도 관리로 등용하는 인사 정책을 통해 규장각 검사관으로 일할 수 있게 되어 '청직'(검사관 일을 했던 사람을 부르는 호칭)으로서 직무를 하게 되었다. 비록 사회 진출의 기회가 열리긴 했으나 당시의 신분적인 제약은 바뀌진 않았다.

*박제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찬밥. 말꼬리 신세. 미천한 신분'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규장각 검사관 일을 수행하기 위해 머물렀던 한양에서 그는 셋방에서 생활하며 집이 없는 넉넉지 못했던 자신의 처지와 권력으로부터도 소외된 처지에 대해서 기록한 내용이 남아있다. (정유각집. 방가행에 기록)

*조선의 시문사대가(诗文四大家):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와 합작해 출간한 시집 《건연집》이 청나라에 소개되자, 청에서는 이들을 조선의 시문사대가라고 불렀다.


더 나은 나라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향한 실학의 (중상학파) 길.

사람의 다름(차이)이 인정되지 않고, 신분과 계급에 따라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박제가의 상공업을 통한 개혁에 대한 소신(所信)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만 배척하지 말고 그들의 발전된 문물을 우선 배워서 조선을 부유하게 만들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책 서문에서 최치원과 조헌 선생이 보여주었던 배움에 대한 자세. 곧 "다른 사람을 통해 나를 깨우치고 훌륭한 것을 보면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려 했다."는 정신을 본받아 살기 원했던 박제가는 《북학의》를 통해서 청나라의 수준을 높일 생각이 아니라 조선이 개혁되길 바랬다. (최치원은 당나라를 방문하고 와서 신라의 수준을 높일지를 고민했고, 조훈은 명나라를 다녀와서 조선의 수준을 높일 것을 고민했다.)


*작은 꿈. 박제가는 한 집안의 평범한 가장으로 은퇴 이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평안한 생활을 꿈꾸기도 했다. 비록 그의 평생에 꿈꾸던 개혁은 집권 세력에 의해 실현되지 못했지만(좌절),




경계선 밖으로 나가서

내가 경험하지 않은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경계선 밖으로 걸어가 봐야 합니다. '나'라는 세상은 늘 '내가 아닌 그(그것)'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명을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은 270년 동안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이후, 청과의 굴욕적인 외교 관계가 맺었다. 청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까지 136년 재임기간 동안 가장 강성한 나라가 되었다. 그 시기에 박제가는 사신단과 함께 네 차례나 연경을 방문하면서 청의 발전된 기술과 생활 수준을 보면서 충격을 받는다.


□ 우선 북학부터: 청나라의 학문과 문물을 먼저 배우자.

오랑캐 청나라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북벌론과, 근대화를 위한 논리로 청의 선진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상황에서, 당시 집권세력 서인(노론)의 논리이기도 했던 북벌론의 밑바탕에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에 대한 생각이 깔려있다. 본질적으로 청은 오랑캐라서 조선과는 다르다는 불평등론과 그와 반대로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의견차를 갖고 있었다. 박제가는 20년 정도 청나라 문명을 배우고 난 뒤에 북벌을 해도 된다고 주장했다. , 북학에 대한 주장에 북벌을 완전히 배제했던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도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찮은 사람의 사건이지만 감히 숨기지 않고 적어, 논설. 차기* 등 무릇 28 항목 53조를 여기에 기록하고 제목을 ‘북학의’라 했습니다.”

-인용. 1799년(정조 23) 통정대부행 영평현령 신(臣) 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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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북학의]에서 인용한 글에서 차기°란 '독서하면서 얻은 것을 틈틈이 기록하는 책'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상소문 형식으로 써서 정조에게 올렸던 글은 행정 처리를 위해 급조된 기록이 아니라, 필요한 정보와 내용을 쪽지처럼 차기에 기록했다가 항목마다 설명을 붙여서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항목별로 정리하고 기록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저술 연도를 기준으로 맨 앞에 나오는 [내편]에는 39개 항목들에 대해 청나라의 것과 차이점과 개선 방향을 비교하여 기술했다. 항목마다 기록 분량이 들쭉날쭉해서 사전적 정보를 전달한다고는 볼 수 없는 미진한 부분들이 있다.(내편에는 교통. 건축. 외국어 등 39개 항목. 외편에는 농업에 관한 장려 정책 등 19개 항목을 기술했다.) 그렇지만 《북학의》에서 박제가가 물건 제작을 위해 중요하게 여겼던 점은 반드시 기준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북학의 집필 여정

박제가(당시 나이 29세)는 1778년(정조 2) 채제공과 이덕무와 함께 중국을 다녀와서 ≪북학의≫ [내편. 외편]을 저술하였는데, 저술 연도를 기준으로 ≪북학의≫는 [내편. 외편. 진북학의] 순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위의 글은, 1789년(정조 22) 12월에 정조가 훌륭한 농서를 구한다는 교지를 발표하자, 1799년(정조 23) 상소문 형식의 ≪진북학의≫를 올린 것으로 정조의 임종 1년 전에 일이었다.


실현되지 못한 아쉬움은 기까지.. 그다음 (한문학 해석과 보관). 나머지 일은 남은 이들의 몫이 된 것이겠지요. ≪북학의≫는 1971년 한학자 이익성 선생에 의해 처음으로 완역되었고,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정유집≫ (1974년)과 한국학문헌연구소에서 간행한 ≪농서≫ 제6권에 (1981년) 원문 대본이 들어 있다. ≪정유집≫은 박제가의 시문을 모아 놓은 것이고, ≪농서≫는 박지원의 ≪과농소초≫와 합간 되었다.




"우리는 왜 가난한가?"


박제가는 지식인으로서 "왜 나라와 백성은 가난한가?"라는 질문에 실천적 개혁을 위한 대안을 내놓기 원했다.

절약과 검소는 있을 때 할 얘기이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절약하고 검소할 수 있느냐.


17세기 농업 중심의 개혁론(중농학파)을 주장했던 유형원. 이익. 정약용이 '가난의 문제'를 '분배'로 해결하려 했다면, 상업 중심의 개혁론(중상학파)로 대표되는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은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가 양성을 제시하는 가운데 '생산'을 통해 가난을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조선 사회 생활상에 대한 기록을 보면 참담한 형편이었다. 박제가 역시 [외편]에서 국가의 가장 큰 병폐는 가난으로, 그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중국과 통상하는 것뿐이라고 기록했다. 역사는 어딜 향해 이동하고 있을까? 문화 간 충돌과 결합을 반복하며 문화의 주체인 사람과 함께 흐르고 있다. 조선 역시 도시 상공인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고, 그들을 대변했던 박제가는 상공업을 통한 개혁을 강조했다.


○ 생산으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자.

○소비가 미덕이다.

○물류 유통구조를 개선하자.

○물건 제작에 표준을 정하자.


□ 생산으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인 토지 분배에 대한 주장이 비주류의 외침에 그쳤던 이유는, 양반과 사대부가 토지와 관직을(부와 권력의 불균형 문제) 차지한 상황에서 비주류의 개혁에 대한 외침은 실현 가능성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토지와 분배 문제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 없는 상황은 당시에 국한한 문제가 아니다.



□ 박제가의 우물론: 소비가 미덕

“소비가 있어야 경제가 발전한다.” 우물물을 퍼올릴수록 새로운 물이 솟아오르듯이 경제에서 생산된 재화는 소비를 통해 재생산되고 재생산은 다시 소비를 유도한다는 내용이다.

생산과 소비의 상호작용을 강조한 핵심은 '백성이 살기 좋게, 나라가 부강할 수 있을까'에 대한 그의 제안이었다. 당시 놀고먹는 양반들도 장사할 수 있도록 나라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직업 평등을 지향했다는 평가를 받는 제안이다. 좀 더 나아가 박제가는 백성의 3분의 1이 상업에 종사하게 하자는 실천적 대안을 제시했다. 종전에 하층 신분을 끌어올리는데서 일진보하여 양반 신분의 사람들이 상공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자고 생각이었다.



□ 수레. 선박 & 길 : 유통구조를 개선하자.

자급자족으로는 소비유통 구조를 혁신할 수 없다. ‘말’을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데 ‘말의 속도’는 사람들의 도보 속도에 맞추다 보니 많은 물건들을 유통할 수 없고, 도보상들이 짊어지고 온 물건만 판매하다 보니 공급량이 적어 가격이 비싸진다. 그러한 물류 유통을 위해 ‘수레’를 도입하자고 했으며, 수레를 이용할 수 있는 선결 요건으로 ‘길’을 내야 하는 개혁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수레를 이용했을 때 이득인 점을 설명하면서, 사신단에 300명의 하인이 동행하는데 도보로 가기 때문에 거지꼴로 연경에 도착할 수밖에 없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 "법도에 맞지 않는 물건..." 즉, 표준이 없는 조선의 물건들: 수레. 다리. 벽돌. 창문 등등

사신단과 함께 방문했던 그는 청의 가옥들마다 창문이 똑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망가지면 같은 모양의 창문을 사다가 그냥 끼우면 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벽돌도 정해진 틀에서 만들어 내니 모양도 같아서 견고한 데다 집 짓는 속도도 빠르고 개보수하는데도 유리하니 물건 하나라도 규격에 따라 제작하면 여러모로 이익이라고 강조했다.

박제가가 "법도에 맞지 않는 물건"이라고 지적하는 의미는, 물건을 만들 때 정해진 규정과 표준이 없다 보니 일에도 능률이 없고, 물건을 만들고도 비효율적으로 사용해서 자원만 낭비하는 형편을 안타까워 했던거다.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청나라 학문과 문물을 배우자는 제안에 대해 중국 오랑캐 문화라고 거부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싫어하는 데 이유가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거 없이 생긴 미움에 대한 자기 책임을 한 번쯤 자문해 보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조선이 어떤 나라인데 네까짓 오랑캐 나라가 감히~'라는 적개심으로 무엇이 달라졌나요? 명분을 지키려 했던 사람도, 개혁을 실천하려던 사람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18세기 후기 실학자였던 박제가를 가지나 잎보다 나무의 뿌리와 같은 존재였다고 봅니다. 땅 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땅속 음지에서 싹(생명)을 위로 밀어올리는 역할을 하는 인물로 말입니다.

《북학의》의 [내편]. [외편]. [진소본북학의]에 기록된 항목들에는 '함께 잘 사는 길'을 찾고 부국을 향한 조선 사회의 변화를 염원했던 그의 수고가 담겨있습니다.

최치원과 조헌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지식인으로서 나눔을 실천하려 했던 박제가의 소신과 열정이 이 책에 숨어 있어서 그 한 조각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참고. [북학의] 박제가 지음.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