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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Jun 09. 2022

Th Day after Trinity/ 해방둥이(2장)

가제 <휘발되지 않는 슬픔은 이제 안녕한가요>


'만약 아버지의 목숨 값을 받게 된다면'을 이어서 쓰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과 그 시대 속 한 가정의 하루를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



The Day after Trinity '그날 이후'라는 작전명으로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준비했던 미국은 '트리니티'라는 용어를 살상 무기 투하 작전에 붙였다. 그래서 암호명 The Day after Trinity 가 '그날 이후'가 된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트리니티'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삼위일체'를 떠올릴 것이다. 원폭 작전명 암호를 보는 순간, 내가 경악 했던 이유가 그것이다.


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 이념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여 절멸시키려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 피난길에서 태어난 아기 -


네이버 지도에서 캡처한 그림. 붉은점은 오사카, 히로시마, 파란점은 제주도이다.


어려서부터 최근까지 아버지로부터 가장 많이 들어왔던 지역명이 오사카이다. 한자로 대판시(大市)로 표기한다.

 아버지는 짧은 유년기를 보냈던 오사카 집 주소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다. 아버지는 당신이 얼마나 총기 있는 아이였는가를 자주 말씀하시는데,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부모가 자주 이야기를 해줘서 기억이 오래갔을 거라고 본다.


1940년대 일본 오사카시.... 번지 목재 건물 2층에서 살게 된 계기는 그곳에서 돈벌이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 일본 제1위 공업 도시였던 대판(오사카)에 제주 도민들이 이주해서 생활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 당시 재일제주민의 인구가 10만 명을 넘을 정도였.


1942년생인 아버지 위에 두 살 터울의 형이 있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어머니(나의 할머니) 셋째 출산이 목전에 었다.


 1945 8월 6일 미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쟁을 끝내기 위해서라고 내세웠던 명분에 따라 '리틀 보이'라는 원자 핵탄두가 히로시마 상공 9,750km에서 투하되고 단 57초 만에 폭발이 일어났다.



1945년 8월 6일 당시 원폭에 의해 파괴된 히로시마현 물산장려관 잔해. 네이버지식에서 사진 캡쳐



미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1945년 8월 6일.  작전명 The Day after Trinity. 핵탄두 '리틀 보이'

닉 케네디의 글 <히로시마 원폭>에서 설명하는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고도 9,750km 상공에서 투하된 폭탄이 자동 폭발 고도에 도달하기까지는 단 57초가 걸렸다. 이로 인해 발생한 버섯구름이 18km 상공까지 치솟았다. 폭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1,5km 이내 모든 것이 파괴되거나 불탔다. 모든 건물의 90 퍼센트가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폭발 당시 히로시마에는 약 25만 5천 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고, 7만 명이 초기 폭발로 사망하였다. 1945년 이후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그에 맞먹는 인구가 사망했고, 지금도 사망과 질병이 이어지고 있다.



지도상에 중간 빨간색 점이 '히로시마'이고, 오른쪽 빨강 점이 '오사카'이다. 어림짐작으로 서울에서 부산 정도의 거리로 추정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발 이후 8월 15일. 계속되폭격에 가족들은 간단하게 보따리를 꾸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로시마에서 다섯 시간가량 떨어진 오사카 상공 위로 전투기가 폭격을 계속 이어갔다.



일본 히로이토항복 선언. 1945년 8월15일.


수 십대의 전투폭격기에서 폭탄이 폭우처럼  불덩어리가 되어 쉼 없이 지상으로 쏟아졌다. 만삭의 산모는 혼자 걸을 수 있는 다섯 살 장남의 손을 붙잡았다. 이어서 세살 난 아들을 등에 들쳐업자 남편은 홑이불 여러겹을 아이 위에 덮었다. 상으로 불덩어리가 떨어져 이불에 불이 붙으면 한 겹씩 걷어내면서 공호를 찾아 뛰었다.


 이윽고 만삭의 아내와 가족들이 불길을 피해 공호로 들어가고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아내의 자궁이 열리고 아이가 보였다. 세상 밖으로 나온 핏덩이의 탯줄을 자를 칼이나 가위 그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었었다.  남편은 자신의 이빨로 탯줄을 끊었다. 히로이토가 전쟁 항복 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피난길에 퍼졌다. 그 날 1945년 8월15일. 그렇게 태어난 '해방둥이' 딸이 나의 고모이다. 엄마의 등에 업혔던 둘째 아들이 나의 아버지이다.


가위 한 자루조차 챙길 수 없었던 목숨이 태어난 피난길이었다. 할아버지의 이빨로 탯줄을 끊고 태어난 아기. 기 얼굴에 핏물을 닦다가 거친 천조각에 긁혀 눈 주위에 미세한 자국이 남았다. 그 당시 흉터가 고모의 눈 두덩이 옆에 예리한 도구로 선을 그은듯 선명하게 새겨졌다.


히로이토의 항복 선언 이후 재일제주인들이  대거 본토로 귀국했다. 그리고 1947년 4월 3일 '제주 4.3' 학살이 일어났다.




가족사를 끄집어 냄

ps:  일본 식민지 지배로 수탈과 강제징용을 당했던 이 땅에 살던 사람 가운데 할아버지가 포함된다. 해방을 맞이한 후에는 자국 정부가 파견한 토벌대에 의해 학살 당한 사람들 가운데 할아버지가 포함되어 있다. 당시 제주 도민의 삼분의 일 이상이 4.3 학살에 희생됐다. 제주도 중산간 마을 주민 전부가 학살되어 정확하게 그 인원 파악이 어려운 곳도 있다.




*브런치에는 여행, 먹방, 취미, 유행, 드라마 리뷰 같은 글이 차고 넘치지만, 그 밝고 가벼운 글의 토양이 기경되기까지 이전 세대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 2장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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