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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Jun 10. 2022

 태희 씨의 제주 오름 (3장)

 가제 <휘발되지 않는 슬픔은 이제 안녕한가요>



나의 할머니 성함은 '김희'로 1921년생이며, 본가는 제주도 한림읍 귀덕 살림이 넉넉한 집에서 태어났다. 딸만 넷이던 태희 씨의 아버지는 집안의 후사를 이으려고 8촌 친척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훗날 태희 씨의 둘째 아들인  아버지는 그 일을 가끔 입에 올리셨다. 외할아버지가 그때 나를 양자로 입양했었으면 내가 그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정말 고생도 고생도... 지독하게 했다, 그 일이 커서도 두고두고 섭섭하더라, 는 말씀. 이젠 세월이 다 지났는데 돌아가신 하르방한테  읍소할 수도 없고, 다 지난 일이라며 말흐리신다.



*3장의 주제 '태희 씨의 제주 오름'은 나의 할머니께서 사셨던 몇 개 상황들을 회상해 본 글이다. 2018년 시월에 향년 97세의 나이로 굴곡지고 한 많았던 생을 마치셨다. 손녀인 나는 조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분들의 삶이 현실이었는지 혹은 드라마가 아니었나 헷갈렸다. 그렇지만 앞에 회상했던 글에 이어 이번 이야기 역시 사실을 근거로 기록했다.


 연기자 김태희가 3대 얼짱으로 인기 스타가 된 것을 보고, 나는 우리 할머니 이름이 주민등록 초본 상에도 그 이름인지 여부가 궁금했었다. 확인 결과 1921년생 김태희가 확실했다.





태희 모녀의 나들이


 태희 씨는 열 살 무렵이던 여름에 겪었던 일이 일평생 한이 되었다며 몸서리를 쳤었다.

1932에서 33년 7월 여름. 림읍 오일장열린 날 태희 씨는 엄마를 따라 장터 구경을 . 물건을 이리저리 구경하던 모녀를 사주 관상을 보던 노인이 불러 세웠다.


"아주망! 관상 보고 갑서~"

...

"쪼끌락한 비바리한테 뭔 사주 관상이꽈?"


"그럼 그냥 봐줄테매. 보고나 갑서."

...


훗날 아버지는 그날 장터에 있던 관상쟁이가 할머니에게 저주를 퍼부은 거라고 하셨다. 어린 여자애한테 젊어서 과부가 되겠다는 게 무슨 관상인가 '저주한다!'라고 주문한 거지. 관상쟁이는 할 수 있는 말과 못할 말의 경계를 판단할 지혜도 없는 작자였던 거지. 



태희 씨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관상쟁이가 스물여섯에 서방 맞으켜, 라는 험악한 말을 지껄였다.




만일 내가 태희 엄마였더라면, 관상쟁이가 엉덩이 깔고 앉은 돗자리며 바닥에 펼쳐 놓은 책을 뒤집어엎고 방금 뱉었던 말 도로 물리라고 악을 쓰며 멱살을 잡았을 거다.


그런데 태희 씨, 우리 할머니 생전에 나는 당신의 속을 한 번도 헤아리지 못했다. 돌아가신 뒤 내 나이가 한 살씩 더해지면서 태희 씨 얼굴을 더 많이 쳐다보지 못했던 게 미안하고 안됐다.


그리고 장터에서 날벼락같은 소릴 듣고 아연실색하며 집으로 돌아갔을 어린 태희와 태희 엄마모습이 그려진다. 그 황망한 장면 눈앞에 그려져 측은함에 가슴이 아리다.





태희 씨의 결혼 생활


기가 찬 스무 살에 태희 씨는 한림읍에서  동쪽으로 구좌읍 행원리 동네에 사는 남자와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신부와 신랑은  귀덕리에서 행원리까지 동쪽과 서쪽을 잇는 혼례라  동네서는 3일 동안 이 선 것처럼 시끌시끌 북적였다. 혼식 전날 친지들과 마을 사람들이 갈대로 엮어 만든 초가집 방마다 가득했다. 혹시 사정상 불참한 이웃을 위해서도  음식을 싸주는 게 제주식 결혼 풍속이었다.

 1미터 80 가량 큰 키의 남자가 일어서면 방 천장에 머리가 닿는 한 방에 오밀조밀 앉은 사람들은 술병을 기울이며 음식을 나누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결혼식이 열리면 '잔치 먹으러 가겐' 하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이유도 그 때문이다.  


흙마당에는 멍석이 깔렸고  수 있는 밥상이 부족하면 이웃집 광에 있던 물건들까지 다 내어왔다. 떠들썩한 잔치 분위기에 흥을 돋우고 신랑 신부의 동선과 전반적인 일을 맡은 부신랑과 부신부도 부산스러웠다. 혼례식 날 신랑은 까까머리 총각처럼 머릴 다 밀었고 신식 양복을 입은 몸이 뽀대나 보였다. 신부는 한복에 연지곤지 찍고 머리엔 족두리 대신 서양식 화환을 썼다. *전통식과 서양식 문화가 섞여 있는 모습을 당시 결혼 기념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제주는 3일간 혼례를 치렀다. 아버지 얘기로는 더 옛날에는 7일 정도로 길었단다. 보통 돼지 5~7마리를 잡아서 일가친척과 마을 사람들 모든 하객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1940년에 부부는 첫째 아들을 낳았다. 이목구비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싶었는데 성품까지 닮게 태어난 아들이었다. 부부는 돌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모래를 날라 땅을 고른 뒤에 고구마를 심었다. 신랑집이 워낙 가난했던 터라 남의 집 돌밭을 일궈주고 품삯을 받아 모은 자금으로 밭을 조금씩 매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부부는 더 성실하게 밤낮으로 일해야 했다. 태희 씨는 해가 뜨면 밭으로 갔고, 날이 좀 더 밝아지면 바다로 물: 나갔.


 *내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는 해녀였어도 상군을 못했단다. 여기서 상군이라는 의미는 물:질을 아주 잘하는 해녀를 부르는 호칭이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춘희 삼춘 역으로 분한 고두심씨가 바로 상군이다. 해녀들이 팀으로 움직일 때 기민하게 상황 파악하고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데, 기후와 바람과 해녀들의 컨디션을 파악하는 것도 상군이 살피는 일이다.



 일제 강점기에 곡물과 쇠붙이들을 수탈당고 옹색한 제주도민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부엌엘 들어가면 왼쪽에 두칸짜리 찬장이 있고 오른쪽 구석엔 쌓아올린 곡물 자루와 고구마를 저장하기 위한 땅굴이 있었다. 제주도의 옛 부엌은 안채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곳에 떨어져 있었다. 두세 계단 돌을 밟고 들어가다보니 키 낮은 꼬맹이들이 다릴 벌리다가 넘어지기 일쑤였다. 양옆으로 찬장과 곡물자루 공간을 제외하면 가운데는 둥그런 앉은뱅이 식탁을 펴놓았다. 온 식구가 엉덩이의자에 쪼그려 앉아서 밥을 먹었다. 변변한 그릇이래야 식구수에 겨우 맞춘 사기 그릇이랑 수저들, 불 아궁이 위에 돌솥과 국솥이 거의 전부였다.


 니집내집 가릴 것 없이 비슷한 형편의 살림에 지금보다 나은 곳이 있다면 어딘들 못 가랴. 름아름 동네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이주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리고 렇게 부부와 첫째 아들 셋이 일본 오사카로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1949년 1월 17일  태희 씨 남편 사망

(당시 남편의 나이 서른. 태희 스물 여덟)


추정 날짜 1949년 1월 15일 밤 아홉시가 됐을 즈음, 옆동네에 친정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오던 젊은 임산부모살 밭(모래언덕)을 넘어 경계 초소 쪽으로 걸어왔다. 배가 불러온 모양으로 보아 서너 달쯤 뒤면 아기가 나올 것 같았다. 태희 씨 동네 행원리로 시집온 젊은 새댁 친정은 바로 옆 마을 월정리였다.


*지금은 월정리 해변에서 행원 까지 해안도로를 걸어서 15분에 도착할 수 있다. 1940년대 당시 두 마을 사이에 모래 언덕을 30분쯤 걸으면 도착했지만, 올레길 랜드마크가 있었던 게 아니라 걸어서 길을 내는 상황이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모래 언덕에 발이 쑥쑥 빠졌고, 강풍에 날리는 모래알들이 얼굴을 때렸다.


1947년 3월 1일 이후 제주도는 이념의 최전선에 놓이게 되었다. 3월1일이 도민 학살의 기폭제가 되어 4월 3일부터 처참한 살인이 자행되었다. 폭도들을 척결한다는 명령에 따라 군인과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착출 되었고 제주도 곳곳에 배치되었다. (북한 서북지역에서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거나 가족들이 남쪽에 내려와서 서울 영락교회로 많은 숫자의 청년들이 청년회에 등록했다. 한경직 목사는 미군정 치하에서 벌어진 제주 사태에 교회 청년들이 차출되어 가는 것을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며 저지하지 않았다.)

들은 백 미터 간격으로 마을마다 경비초소를 세웠다. 만일 옆 동네로 가려면 반드시 통행증 확인과 돌아오는 시간을 지켜야 했고 어기면 처벌을 가했다.



경비초소를 건너서 행원으로 들어온 새댁을 보초병 하나가 불러 세웠다. 아낙의 등에 손가락 크기의 송충이가 붙어 있었던 거다. 한 겨울에 송충이라... 제주도처럼 온대 기후 지역에서 겨울 송충이를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서울에서 토벌 임무를 받고 섬에 들어온 군인들이 지역 기후를 찬찬히 살필 필요까지는 없었다.


초소는 대략 디귿 자 형태로 갈대 지붕을 얹은 초막이었다. 제주 해안가에 1월에 지붕과 지붕을 넘나드는 바람소리는 죽은 원혼의 거칠고 가쁜 숨 소리와 같았다. 매일 밤 경비초소 경비는 마을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보초를 섰다.



보초들은 마당 한가운데 장작불 앞으로 모여들었다. 아무리 따뜻한 기후의 지역이라 할지라도 한 겨울바람과 추위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한기를 이겨야 하니까.

보초병들이 장작 통에 나뭇가지와 풀을 더 던져 넣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의 나무를 넣었던지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불꽃들이 도깨비불처럼 초소 지붕으로 날아가서는 삽시간에 초막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불행은 왜 늘 가까운 곳에서 얼정거리는건지. 초소 불길이 치솟음과 동시에 젊은 임산부가 마을 경계를 넘어온 것이다.


 그녀 등에 붙어 있던 송충이, 그리고 마을 청년 보초병들이 피우던 불씨로 불타던 초가집. 두 개의 상황이 하나로 해석되었다. '한라산에 숨어 들어갔을 빨갱이랑 신호를 주고받는 싸인'이라고....



*날짜상 초소에 불이 났던 날은 1월 15일이었을 것이다. 군인들은 당시 보초를 섰던 열 명 가량의 남자들에게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17일 새벽까지 마을 대나무 숲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참혹하게도 임산부였던 새댁을 포함해서.



태희 씨와 세 자녀들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한 지 4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1945년 해방되고 다시 제주도로 돌아왔으니까.)


 이제 1949년 1월 16일 하루는, 내 할아버지 생에 마지막 하루이자 태희 씨가 남편과 밥상머리에서 마지막으로 서로를 봤던 그 하루가 되었다.




*오름은 화산섬 제주도에 화산이 분출하면서 위로 솟아 오른 작은 산이나 언덕을 일컫는 말입니다.

 태희 씨의 제주 오름은 4.3 폭발로 솟아오른 터진 가슴이며 불태워져 나무가 자라지 않는 민둥산이 된 그녀의 유산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도록 하겠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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