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 장소 '숲'으로 들어가야 하는 주인공소녀가 등장합니다. 그 숲에는 예상할 수 있는 '거인' (혹은 난쟁이, 마귀할멈 등등)이 살고 있는데, 그 거인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믿음'이 있고 없는 여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믿음은 늘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소녀가 숲으로 들어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믿음은 몸을 치장한 장신구로 자신을보여주기 위한 겉치레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믿지 않는 사람은 시도할 필요도 없는 결심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가 드러나는 '발견' 같은 것입니다.
탐험가가 찾고 있던 것이 발견되기 전 까지 숲이라는 곳은 비밀에 싸여 있습니다. 소녀에게 숲은 자신의 비밀이거나, 자신을 보호해주는 피난처이기도 한 그런 곳입니다.
만일 소녀가 숲을 피난처로 느꼈다면, 숲 속으로 들어갈 기회가 찾아올 때 그곳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소녀도 자신이 숲 속에 숨겨둔 비밀에 관해서 알아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소녀는 '깊은 숲 속에, 파란 집에 거인이 살고 있다'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인의 정원》
글 그림 최정인, 브와포레, 2021년
"깊은 숲 속, 파란 집에는 거인이 살고 있대요.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거인'은 '깊은 숲 속' '파란' 집에 살고 있다고 확신하는 실체에 대한 확인은 그런 믿음을 가진 자의 몫입니다. 만일 믿음과 동일한 그 무엇을 발견한 사람은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에 대해 지나친 과장이나 사실을 축소하려는 어떤 시도나 유혹을 거절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발견자에게 드러난 실제는 앞으로 점점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어디서부터 (나를) 소개하면 좋을까요?
자기의 키, 나이, 가족관계, 성격, 출생의 비밀 가운데 어느 것부터 말해야 할지 할 말이 많지만, 소녀는 입을 열고 말하기도 전에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우물쭈물 우유부단한 사람의 머릿속 생각이 아닙니다. 소녀는 지금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하는 중입니다.
즐겁고 반갑고 날아갈 듯 기쁘고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터질 것 같은 기분은 아닙니다.
"뭘 그렇게 고민하니?"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어요.
그 목소리를 따라서 나는 발길을 옮겨요.
"뭘 그렇게 고민하니?"라고... 소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말을 걸어왔다~'
소녀가 소릴 잘못 들었을 수 있지만, 그 질문은 어느 때인가 독백처럼 소녀의 가슴을 한번 부딪치고 올라오며 공명을만들던 그 소리이기도 했지요.
'말을 걸어오는 존재에 대한 궁금증 대신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더 의미 있을 때가 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았어요.
거대한 꽃들이 나를 향해 인사를 해요
'한번'의 개방으로 많은 게 바뀔 수 있습니다. 소녀는 목소리를 따라서 발길을 옮기는 중입니다.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고요. 거인의 정원에 피어있는 거대한 꽃들과 조우하며 인사를 나눕니다. 천천히 한 걸음씩 걷다 보니 소녀의 '기분'도 '시선'도 열리기 시작했나 봅니다.
나도 정원의 풀들 사이를 기분 좋게 걸어가요.
분명 거인의 정원을 걷고 있는데, 두려움과 긴장감에 몸이 뻣뻣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소녀의 감정과 몸은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풀벌레들이 머리 위에서 이리저리 춤을 추고 있네요.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뒤덮어요.
순식간에 구름은 푸른 정원에 비를 내리기 시작했어요.
통, 통, 통, 토도도 통통!
작은 빗줄기는 점점 거세지며 숲을 빗소리로 가득 채워요!
비가 그친 정원의 공기는 맑고 영롱했어요.
비를 가득 담은 정원은 빛나고 있어요. 나는 꽃잎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해요.
비를 피해 파란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주변을 살피다 가만히 앉아서 거인을 기다리기로 했어요.
'질문하는 소리. 거대한 꽃들과의 인사. 맨발로 숲길 걷기. 춤추는 풀벌레를 따라 춤추기. 푸른 정원에 내리는 비. 거인의 서재' 소녀가 잠깐 가만히 있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이전과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기 직전입니다.
거인의 서재에 들어간 소녀는 가만히 앉아서 거인을 기다리기로 합니다. 거인의 존재를 믿어왔어도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기다림'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건 아주 잘한 일 같습니다.
믿음 뿐만 아니라 사람, 사건, 사물에 대해 제대로 된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직면하는 것'만큼 좋은 해결책은 없는 것 같습니다. 소녀는 거인이 어떤 인상을 짓든 무슨 말을 하든 기다려서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게."
두번째로 들려온 부드럽게 속삭이는 소리는 소녀의 말을 듣겠다는 바람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연인의 사랑보다 고귀한 사랑이 담긴 말입니다.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게."라는 말. 소녀가 자신이 없었던 숱한 이유들을 설명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마치, "네가 하고 싶은 말이면 어떤 말이든 괜찮으니 듣고 싶다."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사람이 사람 때문에 지칠 때가 간혹 발생합니다. 내 속에 뱉어내고 풀어낼 이야기가 한 보따리 있어서 그걸 다 말하고 싶을 때, 나보다 더 장황하게 많은 말을 하는 사람과 대화하면 지치고 진이 빠집니다. 오늘은 아니구나! 무슨 핑계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는데...라며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실수해도 정답이 아니어도 선택이 달라도 소녀가 말하는 모든 것이 소녀 자신이라고 들어줄 존재가 있어야했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지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어요.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으니까요.
별이 빛나고 있었고, 흙은 따뜻했어요.
'참 아름답네요. 참 아름답고 좋습니다!' 치유의 시간이 정원 가득 채워지고 있습니다. '별이 빛나고 있었고, 흙은 따뜻했어요.'라고 말입니다.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왜 소녀는 맨발로 '거인의 정원'을 쏘다녔던 걸까요?
맨발로 흙길을 걸어본 사람의 대답을 듣는다면 그것이 소녀의 대답이라고 여기겠습니다.
'거인의 정원'과 '소녀의 맨발'은 자연과 인간이 만나 하나가 된 우주와 같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또 다른 피조물 자연과 만나는 것만큼 자유를 누릴 공간이 세상에는 그렇게 많이 없는 것 같습니다.
친구들과 학교는 너무 작아서 찾을 수 없었지만, 되돌아가는 길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마을로 되돌아가는 길 위로 노을이 지고 있어요. 세상은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었어요.
저기 친구들이 보였어요.
나는 신이 나서 한걸음에 달려가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으니까요!
저도 '거인의 정원'을 꼭 한번 갔다 와야겠습니다. 그전에 소녀가 가졌던 믿음처럼, '깊은 숲 속, 푸른 집에는 거인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믿음부터 마음에 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