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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Why not Cu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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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Sep 17. 2020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지킨다면

08. 다 같이 돌자, 비냘레스 한 바퀴

여행 3일만에 맛본 숙면이었다.

어찌나 깊게 잤던지 밤사이 모기가 눈두덩이를 무는 것도 몰랐다. 덕분에 한쪽 눈이 누구에게 맞은 것처럼 팅팅 붓고 말았다.


숙면 덕에 개운해진 몸을 끌고 식탁 앞에 앉았다. 가볍게 먹을 생각이었는데 음식이 끊임없이 나왔다. 주인 할머니께서 먹는 시늉을 곁들이며, '꼬메 또도스'(다 먹어요)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포크질을 열심히 했지만 음식이 줄지 않았다. 결국 반 이상 남겼다. 아, 아까워.


까사 히라솔은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주인 할머니와 함께 조식을 차린 분은 며느리라고 했다. 그녀(나디아)와 남편, 딸(이사벨라)이 주인 할머니 부부와 까사를 꾸려가고 있었다. 식구들은 모두 친절했고, 내게 이것저것 챙겨주려 했다.


오늘의 아침식사. 양이 엄청나다. 두 개의 보온병에는 각각 커피와 분유 맛이 나는 우유가 들어있다.
테라스 한 편에 있던 테이블과 의자. 저 의자에 앉아 멍 좀 때리고 왔어야 하는데.


비냘레스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유명하다. 천연동굴, 부드럽고 둥글게 이어진 능선, 거대한 벽화, 시가농장 등이 관광 포인트다. 이 지역만의 특이지형인 석회층 계곡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단다. 대부분의 관광객이 트레킹, 하이킹, 택시 혹은 말(!) 투어 등으로 관광지를 둘러본다. 하지만 세 가지 모두 혼자 여행하는 내게 적합한 방법은 아니었다. (이럴 때는 좀 아쉽다) 우선, 투어버스를 타보기로 했다.


말 투어로 비냘레스를 둘러보는 사람들. 까사나 여행사 등에서 예약할 수 있다.


놓지마, 정신줄!


우선 뜨리니다드로 가는 비아술 버스표를 예매하러 갔다. (2016년 여름 기준으로) 당시 비냘레스에는 비아술 터미널이 따로 없었다. 중심가의 한 건물 작은 사무실에 매표소가 마련돼 있을 뿐이었다. 'viazul'이라고 적힌 팻말이 붙어있는 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전날 운행시간표를 찍은 곳과 같은 장소다) 창구에서 '빠사도 마냐나, 뜨리니다드'(내일모레, 뜨리니다드)라고 말하니, 직원이 예약증으로 보이는 종이를 건네줬다. 가격은 37쿡. 40쿡을 내고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서는데 뭔가 이상했다. 아뿔싸, 잔돈을 안 받았구나. 다시 창구로 돌아가서 '깜비오, 깜비오'(잔돈, 잔돈)이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직원은 미안한 기색 없이 거스름돈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들이!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꿀꺽했겠네. 다시 한번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다. 치안이 좋은 곳이라지만 소소한 범죄가 종종 일어난다고 들었고(그래서 손전화를 털렸지..), 이 작은 것들이 소중한 여행을 망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뜨리니다드행 비아술 예약증. 새끼손가락 두 개를 합쳐놓은 듯한 크기다. 워낙 작아서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했다.
비아술 매표소 옆에는 쿠바 국영 여행사 꾸바나깐 사무소가 있다. 나는 이곳에서 까요 레비사 데이투어를 신청했다.


투어버스를 타기 전 까데까(환전소)로 향했다.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천연덕스럽게 '울띠모?'라고 묻는 자신을 보며 잠시 '쿠바 사람 다 됐네'라는 착각에 빠졌다. 내 뒤로 동양인 2명이 줄을 섰다. 대화하는 걸 들으니 중국에서 온 것 같았다. 쿠바에서 동양인을 만나는 건 매우 희귀한 일이다 보니, 우리는 서로를 반가워하면서도 무슨 이유에선지 누구 하나 선뜻 대화를 먼저 걸진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눈치만 보다가 결국 대화를 하게 됐다. 두 사람은 근처 마을과 해변 투어를 한다고 했다. 렌트한 차에 한 자리가 남는데 함께 갈 생각이 없냐 물었다. 손전화를 잃어버린 데다가 외롭기도 해서 살짝 흔들렸지만,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게 더 중요하고 필요했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환전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진만 보면 좌측 여자분이 마지막 대기자일 것 같지만, 절대 아니다! '울띠모'로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투어버스 타고 비냘레스 한 바퀴


500mL 물 두 병을 사서 투어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앉으려는데 기사님이 "레이디, 세뇨리따"하며 나를 부른다. 아뿔싸, 요금을 안 냈네. 무임승차할 뻔 했다. 투어버스 이용요금은 5쿡. 돈을 건네니 티켓을 준다. 이용 방법은 아바나에서와 같았다. 티켓을 산 날짜에 한해 종일 투어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우선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전체 코스를 살펴보기로 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난 후 선사시대 모사 벽화 앞에서 내렸다.


비냘레스 투어버스와 이용 티켓.


투어버스 안에서 본 비냘레스 풍경.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찍었더니 구도와 초점이 엉망이다.
쿠바의 7월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금세 하늘이 어두워지며 비가 왔고, 또 금세 날이 갰다.


벽화는 웅장하고 화려했다. 높이가 80m고 길이가 120m에 달하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그게 다였다. 선사시대 때 그려진 건 아니고 당시를 모사한 벽화란다. 1960년대에 그려졌고 4년 동안 18명의 미술가가 참여해 완성했다는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투어버스 경로에는 시가농장 견학, 동굴투어를 할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내겐 관심 밖이었다. 비냘레스의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이 궁금했다. 서둘러 중심가로 돌아왔다.


쿠바 진화의 역사를 표현했다는데, 글쎄...?
기념품 가게에서는 시가와 머그잔을 팔고 있었다. 기념으로 머그잔이라도 살까 잠시 고민했는데, 지금 보니 안 사길 잘했다. 아, 여행이 주는 착시란.
할아버지는 보이는 관광객 모두에게 승마 체험을 권했다. 하지만 아무도 타지 않았다. '오늘은 허탕 쳤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도 편하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 슬쩍 끼어들고 싶었지만, 영어를 못하는 데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그만두었다.
투어버스 기다리던 중. 냥이야, 넌 어디서 왔니?


상점에 들러 2L 물 두 병을 샀다. 2.4쿡. 계산 후 문을 나서는데 한 직원이 나를 불렀다. 오늘 '세뇨리따'라는 말을 여러 번 듣는구나. 직원은 영수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응? 내가 물건을 훔쳤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 옷차림이 좀 후줄근 한 건 사실이다만, 너무 하네. 직원은 걷네 받은 영수증을 반으로 접고, 접힌 부분을 찢어 구멍을 냈다. 알고 보니 모든 고객의 영수증을 확인하더라. 상품 도난 방지 차원인 듯했다. (의심해서 미안요..) 물을 들고 숙소에 들어가 잠시 쉬다가 다시 나왔다. 그리고 정처 없이 걸었다.


문제의 영수증, 그리고 쿠바산 생수. 물은 보일 때마다 넉넉하게 사두는 것이 좋다. 더워서 자주, 또 많이 마시기 때문이다.
수공예품 시장. 체 게바라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아바나에서 살 생각에 둘러보기만 했는데, 머그잔과 달리 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비냘레스가 훨씬 싸다.
에떽사(쿠바 공영통신사) 근처에 가면 와이파이 신호가 잡힌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유.
오, 극장이네!
잡지를 팔고, 콘서트와 서커스도 하나 보다.
비냘레스의 풍경.
숙소로 돌아오다가 만난 아가들. 수줍게 브이!


한참을 걷다 숙소로 돌아와 주인 할머니의 손녀인 이사벨라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까 숙소에 잠시 들렀을 때 한국에서 가져간 과자를 나누어주었는데 맛있었나 보다. 특히 하리보 젤리가 가장 맛있다더라.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던 건지 길가에서 직접 꺾은 듯한 꽃 한 다발을 건넸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울 수가! 고맙다며 꽃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이사벨라의 표정이 묘하다. 알고 보니 갖고 싶은 것 하나를 고르라는 거였다.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다 진분홍색 꽃 한 송이를 골랐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캐리어에 있던 하리보 젤리를 몽땅 들고나와 이사벨라에게 주었다. 그녀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가장 왼쪽이 이사벨라. 오른쪽은 자매인 줄 알았는데 이웃사촌이란다. 이사벨라가 준 꽃은 이내 시들어버렸다. 슬퍼할 것 같아서 다음날 외출하면서 몰래 처리했다.
오늘의 저녁 식사. 역시 푸짐하다. 랍스터 요리도 돈 또마스보다 맛있었다. 조금 짰지만.
오늘도 모히또. 참고로 쿠바 까사의 저녁식사에는 대부분 음료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뭐 마시겠어요?"라는 말에 속으면 안 된다. 무료인지 반드시 확인할 것!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저녁식사 후 잔뜩 부른 배를 두드리며 오늘 하루를 복기했다.


우선 인정 많았던 투어버스 기사 아저씨가 떠올랐다. 아저씨는 버스를 운전하다 주민을 만나면 클랙슨으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마차를 만나면 피하라고 눈치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심해서 피해가며 운전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 아마 "지금 도로에서 뭐 하는 거예요?"라며 욕설이 난무했겠지. 신호등 없는 로터리에서는 다른 차에게 먼저 가라며 양보하기도 했다. 걷고 있는 주민을 만나면 버스를 세우고 '어디까지 가느냐' 물었고, 그 목적지가 투어버스 경로에 있으면 태워다주기도 했다.


다음으로 떠올린 건 동네 골목에서 마주친 마차 아저씨. 사진 찍는 게 조심스러워 눈치 보며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게 개의치 말라는 눈빛을 보내며 환하게 웃어줬던 그분.


그리고 꽃을 건넨 이사벨라까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쿠바에 오는 대부분의 관광객이 비냘레스를 매력적인 곳이라고 여기지 않는단다. 그래서 당일치기나 1박만 하고 대강 둘러볼 뿐이라고. 보거나 즐길 게 그만큼 없어서라고 한다.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조용한 이 마을이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래서 비냘레스가 좋았다.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아바나와 달리,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지키는 것 같았달까.


내일은 까요 레비사 데이투어. 사실 까요 레비사는 내가 비냘레스에 온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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