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다정했을지도 몰라

03. 눈 내리는 날을 좋아하나요?

by Alicia

많이 읽지도 못하면서 책 욕심만 그득한 병렬독서자인 나. 요즘에는 '일상의 낱말들'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열여섯 개의 일상 단어에 관해 네 사람(김원영, 김소영, 이길보라, 최태규)의 다른 시각을 담은 에세이 모음집이다. 밥, 커피, 장난감, 병원 등의 단어가 다채롭게 해석되는 게 흥미롭고, 나는 어떤 내용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상상도 하면서 신나게 페이지를 넘기는 중이다.


오늘 내 일상의 단어는 무엇일까. 마침 117년 만에 11월 최대 적설량을 기록했다고 하니까 '눈'(snow)이라는 단어를 꺼내보겠다. 사실 나는 눈 내리는 날을 그리 반기지 않는다. 과거의 눈은 내게 '단절'을 상징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고향 마을에는 하루에 네다섯 번 딱 정해진 시간에만 시내버스가 오간다. 최근에야 도로를 정비하면서 사정이 나아졌다지만, 예전에는 인도와 차도를 구분할 수 없는 시멘트 포장길을 지나야 마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길이 고르지 않고 언덕이 많은 탓에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교통이 마비되기 일쑤였다. 버스 운행이 멈추는 건 당연지사. 눈 소식이 들리면 평소보다 빠르게 등교 채비를 마친 후 '제발 버스가 들어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정해진 시각이 한참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고 길 위가 고요하다면 그날은 꼼짝없이 1시간을 걸어 학교에 가야 했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여섯 살 때부터 고등학교 기숙사 들어가기 전인 열다섯 살까지 그랬으니 꼬박 10년이다. 막상 헤아려보니까 눈 내리는 것을 두려워했던 역사가 이리도 길다.


오늘 아침, 창밖을 보니 아파트 화단에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렇기 때문인지 눈이 오는 날씨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먼저 생각하는 버릇 아닌 버릇이 생겼다. 보송보송하고 포근해 보이는 눈의 시각적 아름다움보다는, 그것들이 쌓이고 뭉쳐서 만들어지는 빙판길의 차디찬 온도부터 떠올리게 됐다. 눈을 밟을 때의 뽀드득 기분 좋은 청각적 자극보다는, 질퍽해진 눈길에 젖어버리고야 마는 축축한 운동화부터 상상하게 됐다. 눈 위에서 엎어져서 옷이 엉망이 되고, 영하 온도에 볼과 손이 부르트던 불쾌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도 설레거나 즐겁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내 쌓인 눈을 종일 치우시던 경비원분들의 노고에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을 뿐.


눈에 대해 정말 '부정적인 기억'만 남아있는 걸까. 저녁 식사 후 설거지하면서 오래된 추억을 펼쳤다. 그 속에는 비료 포대 썰매를 타고 눈 쌓인 언덕을 괴성과 함께 미끄러져 내려가는 꼬마가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겠다며 어지러움을 참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어린이도 있었다. 옷과 신발이 눈에 젖어 축축해져도, 빙판길에서 넘어져 무릎에 멍이 들어도, 추운 날씨에 입술이 터지고 콧물이 줄줄 흘러도 마냥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때의 나는 눈을 싫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사랑했다. 그때의 눈은 나에게 한없이 다정한 존재였다.


편집된 기억에 사로잡혀 따뜻한 순간을 싹둑 잘라버린 간사한 나의 두뇌.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애틋한 순간이 더 많지는 않을까. 다 잃어버리게, 다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생긴다. 나를 둘러싼 일상의 단어들로 기억 파묘 작업을 시작해야겠다. 그렇게 오늘처럼, 망각 속에 버려두었던 다정했던 순간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싶다. 그리고 미래의 나를 위해, 매일의 순간을 최대한 다정하게 가꿀 수 있도록 애써봐야지.


내 최애(제로베이스원 김태래)는 눈 오는 것을 참 좋아하더라!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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