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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Jun 07. 2019

그곳에서 나는 송곳이었다

[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08. 아레키파에 아쉬움을 남겨두었다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


아무리 남미여행 비수기라고 해도, 대다수의 한국 여행자가 건너뛰는 곳이라고 해도, 동양인 만나는 게 이렇게 어려워서야 되겠나. 아레키파에 있는 3일 내내 동양인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아르마스 광장에서 몇몇 동양인과 마주칠 수 있었을 뿐이다.


이 많은 사람 중 동양인이 나뿐이라니!


금세 누구라도 찌를 듯이


덕분인지, 때문인지 어딜 가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튄다는 것, 다르다는 것. 그곳에서 나는 여러 의미에서 송곳과 같았다. 현지인과 다른 모습은, 혼자라는 생각에 살짝 예민해진 마음은 금세 누구라도 뾰족하게 찌를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길을 걷다가 누군가를 찌르고 말았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그들은 신기하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아리가또', '치나(중국 여자)' 따위의 단어를 내뱉었다. 나는 웃으면서도 단호하게 '노 아리가또, 노 치나'라고 답했다. 동양인이 신기해서 나온 반응이겠지만, 차별이 덕지덕지 묻은 말을 참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일본인으로 오해받은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보통은 '치나'나, '꼬레아나'(한국 여자) 정도만 들었지, '하포네사'(일본 여자)라는 말은 한 번도 안 들어봤기 때문이다. 외모 탓인지, 아니면 일본인들이 남미 여행을 잘 하지 않는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레키파에서는 시내 관광을 주로 했다. 가장 큰 시장이라는 산 카밀로 시장에도 갔다.
시장 구석구석을 살폈지만, 개구리를 갈아넣은 주스는 찾을 수 없었다.
아레키파와 쿠스코에서는 가는 시장마다 이 빵을 팔고 있었다. 기괴했던 것 중 하나. 언어가 되었다면 무엇이냐고 물어볼 수 있었을텐데. 아, 스페인어 열심히 공부해야지.


죽을 때까지 종교를 갖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페루 전체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종교 시설이라는 산타 카탈리나 수녀원은 하나의 작은 도시 같았다. 수녀원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16세기 말에 건립되어 무려 400여 년 동안 폐쇄된 교단으로 운영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가 되어서야 대중에게 개방하기 시작했단다.


이곳의 수녀들은 대부분 정략 결혼이 싫어 도망친 이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종교적 사명감이나 신앙심이 얼마나 깊었겠느냐 만은, 무언가를 피해 숨어야 한다는 것은 슬픈 사실에 틀림없다. 더구나 이곳 역시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수녀가 되려면 지참금이 필요했는데, 많은 금액을 지불하는 이들은 좋은 시설에 머무를 수 있었다. 누군가는 하녀까지 달린 방에서 호화로운, 다른 누군가는 창문조차 없는 좁은 방에서 궁색한 삶을 유지해야 했다. '하느님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고 모두 한 형제자매'라는 그들 종교의 교리가 모두 부질없게 느껴졌다.


산타 카탈리나 수녀원은 꽤 넓다. 제대로 둘러보려면 한나절은 걸릴 것 같다.
마치 작은 도시 같았던 산타 카탈리나 수녀원.
이러려고 삼각대를 챙긴 것은 아닌데.. 혼자 다니니 어쩔 수 없네.


무식하면 몸이 고생하거나 돈을 많이 쓰거나


따뜻한 아레키파에서도 감기의 기세는 여전했다. 멎지 않는 기침에 괴로워하다가 고기 좀 먹으면 나아질까 싶어 어느 여행 후기에서 보았던 지그재그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가성비가 좋다는 57솔짜리 세트를 주문하려 했으나, 아무리 찾아도 그 메뉴가 보이지 않았다. 귀찮은 마음에 블로그에서 찾은 이미지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계산서를 받아보니 67솔이다. 알고 보니 나는 세트가 아니라 메뉴를 다 따로따로 주문했더라. 어쩐지 세트에 달려 나오는 아이스크림치고는 너무 크고 장식도 화려하더라니. 제대로 알아보고 주문할 것을! 페루에 도착한 후 한 끼에 많이 써야 20솔이었는데, 이날은 한 끼에 하루 치 밥값을 다 쓰고 말았다. 그래도 알파카 고기 맛을 봤으니 됐다. 57솔과 67솔은 한국 돈으로 차이가 3500원 정도밖에 안 나기도 하고.


지그재그에서는 알파카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다. 나는 닭고기와 소고기, 알파카 고기를 맛볼 수 있는 메뉴를 주문했다.
세트 메뉴에 포함된 아이스크림치고 어쩐지 너무 고급스럽더라니.


남겨둔 이야기, 남겨둔 아쉬움


쿠스코로 떠나기 전날, 숙소 테라스에 앉아 멍하니 노을을 바라봤다. 리마에서 묵었던 올라페루 사장님께서 '아레키파는 2~3일 머물며 멍 때리기 좋은 곳'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이 이해가 갔다. 도무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아리 퀴페이'(Ari qhipay, 그러시오. 머무르시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따뜻한 데다 평화롭고, 카메라를 덜렁덜렁 들고 다녀도 안전했던 곳을 떠나려니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움을 남겨두고 다음 여행지로 향하기로 했다. 그래야 또 오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을 테니까. 언젠가 남겨둔 아쉬움을 가지러 또 올 수 있을 테니까.


'아레키파'하면 노을이지!
안녕, 우리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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