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09. 쿠스코에 도착하다
쿠스코. 마추픽추를 가기 위해 들러야 하는, 많은 사람이 반했다던, 말로만 듣던 그 쿠스코.
하지만 내게 쿠스코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우선 사람이 너무 많았고, 매연도 심했다.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달리는 차들이 쉬지 않고 뿌연 연기를 뿜어댔다. 가뜩이나 감기로 고생 중이었던지라 매연이 반가울 리 없었다. 기침이 멎지 않고 계속 나왔다. 먹구름이 잔뜩 낀 비오는 날씨, 도시에 꽉 찬 칙칙한 색의 건물들, 쉼 없이 뿜어져 나오는 매연. 아레키파가 백색도시였다면, 쿠스코는 회색도시에 가까웠다. 적어도 나에게는.
숙소 체크인을 하고 마추픽추에 함께 가기로 한 Y언니와 S언니를 만났다. 마추픽추에 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여행사를 통해 패키지로 갈 수도 있고, 기차와 숙소, 마추픽추 입장 티켓 등을 직접 구매해서 갈 수도 있다. 잉카 정글 트레킹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건 우리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미리 메신저로 연락했던 우리는 패키지와 자유여행을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F여행사의 프로그램 금액 책정이 결코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후기를 보면,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숙소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는 평 일색이었다. 때마침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향하는 잉카레일이 프로모션 중이라 열차 티켓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다. 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쿠스코에서는 총 4일을 머물렀다. 그중 하루는 마추픽추에 다녀왔다. 나머지 3일은 숙소에서 쉬거나 시내관광을 하며 쉬엄쉬엄 다니기로 했다. 우먼따이호수, 비니쿤카 등 마추픽추 말고도 근교에 볼거리가 가득했지만, 감기가 심해 체력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미리 쿠스코에 와 있던 Y언니는 비니쿤카에 갔다가 눈보라 때문에 무지개산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고산지대라 날씨가 변화무쌍한데, 하필 언니가 간 날에 눈보라가 쳤단다. 언니가 보여준 사진에는 판초와 털모자로 무장하고도 입술이 새파래져서 덜덜 떨고 있는 그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표정은 환히 웃고 있었다. "추웠지만 즐거웠어."라는 그녀의 말에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터진 마른기침이 그 마음을 싹 거두어주었다. 그래, 쉬자. 쉬어야 해.
여행을 많이 해 본 편은 아니지만,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여행은 삶과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예측불허의 순간이 불쑥 찾아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언니들과 수다를 떨며 우리의 여행을 덮친 것들을 하나둘씩 꺼냈다. S언니는 궃은 날씨 탓에 항공편이 결항되어 약 14시간 동안 볼리비아 라파스에서 쿠스코까지 버스를 타고 오게 된 에피소드를 꺼냈고, Y언니와 나는 와라스에서 겪었던 고산병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꺼냈다. 힘들었고, 짜증이 났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 순간을 안주 삼아 대화 나누는 동안만큼은 힘들지도, 짜증 나지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다. 삶이 그런 것처럼, 신기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