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11. 쿠스코 단상
10월 말의 쿠스코는 추웠다.
하지만 숙소에는 난방 시설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페루에 도착한 이래 리마 한인민박을 제외한 모든 숙소에서 난방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원래 다들 이렇게 지내는 건가. 한국의 뜨끈한 온돌방이 그리워졌다.
숙소 주인에게 히터가 있냐 물었지만, 제공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여분의 담요를 주겠노라 했다. 그동안 베드버그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었던 터라 나는 괜찮다며 사양했다. 대신 매일 밤 기모 후드티셔츠와 경량패딩, 바람막이에 머플러까지 한 채 잠들곤 했다.
한국에서는 아프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가능한 휴가를 내서 쉬려고 애쓰는데, 이상하게 쿠스코에서는 정말 ‘많이’ 아팠는데도 정말 ‘열심히’ 돌아다녔다. 여행만이 줄 수 있는 ‘어떤 힘’. 오늘은 그 어떤 힘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쿠스코에서의 몇 가지 경험을 적어보려 한다.
2020년의 키워드 중 하나가 ‘느슨한 연대’라고 한다. 각자의 필요로 손쉽게 헤쳐 모이는 것을 뜻하는데, 여행에서 동행자를 구하는 것 역시 느슨한 연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요 관광지는 보통 여럿이 모여가야 비용을 절감하거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동행을 구하게 된다. 이들은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지 않는다. 대부분 해당 여행지만 동행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대신 함께하는 동안만큼은 철저히 서로를 배려하고 그 순간을 즐기려 노력한다.
나 역시 여행하며 여러 차례 헤쳤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쿠스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J언니와 H씨와 함께 산 페드로 시장에 갔다. 아레키파에서 맛보고 홀딱 반해버린 마라꾸야 주스를 시키고 기다리는데, 여학생 한 무리가 다가왔다. 그들은 대뜸 H씨에게 사진을 찍자고 했다. 한류열풍. 듣기만 했지, 목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연예인과 같은 나라에서 온 남자라는 이유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H씨에게 열광하고 있었다. 나는 BTS 멤버가 몇 명인지도 모르는데, 그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잉카인이 태양신을 섬겼던 신전 코리칸차. 잉카제국 시대에는 문과 지붕 등이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스페인의 침략으로 지금은 초석만 남고 그 위에 정복자들이 세운 산토도밍고 성당이 들어서 있다. 일본이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은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며 둘러보는데, 바로 옆으로 일본인 관광객 무리가 지나갔다. 기분이 묘했다.
페루 국민 대다수가 믿는 가톨릭이 침략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일제 치하 기간이 길었다면, 어쩌면 우리도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의 민속신앙인 신도를 믿게 되었을 수도 있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코리칸차는 덧대어짐의 결과물이다. 잉카의 건축 양식 위에 덧대어진 스페인 건축 양식, 재건을 위해 그 위에 또 덧대어진 새로운 양식. 극명하게 대비되는 잉카와 스페인의 건축 양식을 보니 제국주의의 끔찍함에 몸서리가 났다. 그리고 그 옛날 황금으로 찬란하게 빛났을 신전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감명을 너무 깊게 받은 나머지, 평소 잘 사지 않는 기념엽서를 다섯 장이나 구매했다.
쿠스코에서의 마지막 날, 도시 전경을 못 본 게 아쉬워서 예수상이 있는 크리스토블랑코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서 겁도 없이 왜 그랬나 싶은데, 당시에는 보고 싶은 마음이 두려움을 앞섰다.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고, 또또 오르고. 오르다 보니 중심가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인적이 드물고 건물도 허름했다. 알고 보니 쿠스코도 지대 높은 곳에는 빈민가가 많다고 하더라. 싸한 기분이 들었지만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반쯤 올랐을까. 언덕 위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그는 한눈에 봐도 무엇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내게 본인은 칠레 사람이라며 알 수 없는 스페인어를 마구 쏟아냈다. 알아들은 것이라곤 ‘casa’(집)와 ‘amiga’(친구)라는 단어 두 개뿐이었다.
내가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자연스레 뒷걸음질을 치던 중 칠레노 뒤로 걸어오는 인디헤나 한 명이 보였다. 이때다 싶어 재빨리 뒤돌아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욕을 읊조렸다. “또라이 새끼, 왜 지랄이야!” 옆을 지나던 인디헤나가 힐끔 나를 쳐다봤다.
놀란 가슴을 쓸어안고 산크리스토발 전망대로 행선지를 바꿨다. 다행히 그곳에서도 도시 전경이 잘 보였다. 저녁 때쯤에는 운 좋게도 동행을 구해서 크리스토블랑코에 다녀왔다. 우리는 딱 크리스토블랑코만 함께 보고 각자 갈 길을 갔다. (아주 짧았던 느슨한 연대였다..!) 쿠스코의 야경은 낮의 사건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아름다웠다.
이제 페루의 마지막 여행지인 푸노로. 이번 여행도 벌써 중반을 넘어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