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12. 티티카카 열차 타고 푸노로 가는 길
드디어 푸노로 향하는 날.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안데스산맥을 가로지르는 열차를 탈 수 있다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벅찬 일인가!
쿠스코에서 푸노로 이동할 때, 한국인 여행자들 열에 아홉 이상은 야간버스를 택한다. 배낭여행자에게 금보다 더 귀하다는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기차'뿐이었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본 안데스산맥에 관한 한 편의 짧은 영상 때문이었다.
찾아보니 페루레일에서 '티티카카 열차'라는 상품을 만들어 쿠스코와 푸노 구간을 운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티켓 가격이 너무 사악했다. 편도가 240달러라니?! 한화로 무려 27만 원 정도다. 어쩐지 상품 소개 페이지가 지나치게 고급스럽더라. 게다가 한국인 여행자들은 이 열차를 이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한글 후기도 전무했다. 짧은 영어로 구글에서 후기를 검색한 후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홈페이지에 적혀있는 '최상의, 독보적인 서비스'를 마음껏 누려보기로 했다.
티티카카 열차는 이른 아침에 쿠스코 완착(Wanchaq)역을 떠나 저녁 6시 정도에 푸노에 도착한다. 그야말로 종일 기차'만' 타는 셈이다. 열차는 종종 정차하고, 기내에서는 공연, 피스코 사워 시음 등의 행사가 진행된다. 점심 식사로는 스테이크 코스가 나오고 중간중간 간식과 애프터눈티도 제공된다. 게다가 승무원들은 수시로 필요한 게 없는지 묻는다(나는 솔직히 "나 영어 못하니까 그만 물어."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가장 독보적인 서비스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것들에 수시로 넋을 잃었고, 셔터를 누른 후 찍힌 사진을 확인할 때마다 '왜 이 정도밖에 담지 못하는가'라며 연신 한탄을 해댔다. 기내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덕에 감동은 배로 불어났다. 누구에게라도 연락해서 자랑하고 싶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게? 무려 안데스산맥을 가로지르는 중이야!"
열차가 가로지르는 것은 또 있었다. 바로 누군가의 삶터였다. 신기하게도 이 열차는 훌리아카 지역의 한 시장을 가로질렀다. 기찻길을 따라 양쪽으로 늘어선 낡은 상점들. 주민들은 익숙하다는 듯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열차와 승객을 바라봤다. 꽤 불편할 텐데. 기차 소리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을 텐데. 하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인 듯했다. 어린 아이들은 환히 웃으며 반갑게 손을 흔들기도 했다. 불편이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상이 될 정도로 익숙해졌다고 해도, 그 불편이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불편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중세시대에는 하층민이 불편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문제를 제기할 생각조차 못 했다는데, 훌리아카 주민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복잡미묘한 감정이 마음을 채웠다.
그렇게 10시간을 달려 하늘과 맞닿은 도시 푸노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내가 꿈꾸던, 그리고 내 인생 최고의 영화 '후아유'의 주인공 인주(이나영)가 꿈꾸던,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 티티카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