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07. 안녕, 아레키파!
페루 남부에 있는 아레키파. 페루 독립 당시 리마와 수도를 두고 경쟁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유서 깊은 도시다. 스페인 양식과 잉카제국 양식이 섞인 독특한 건축양식 덕에 도시 중심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보통의 한국 여행자들이 택하는 리마-이카-쿠스코 코스의 반시계 방향 동선에서 살짝 비껴나 있다. 때문에 콜카캐니언을 보러 갈 것이 아니라면 여행자 대부분이 건너뛰는 곳이다. 나 역시 콜카캐니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아레키파는 여행을 결심한 순간부터 방문 1순위였다. 백색 화산암으로 지어진 건물이 들어차있는 사진 속 풍경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감기에 걸린 탓에 페루 도착한 이래 계속 떨면서 지냈다. 옷차림도 자연스레 두터워졌다. 와라스에서 리마까지는 속옷, 반팔티셔츠, 남방, 경량패딩을 겹쳐 입은 것도 모자라, 트레킹 할 때만 입으려고 챙겨온 바람막이를 교복처럼 걸치고 지냈다. 하지만 아레키파는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난 후, 바람막이를 입고 나갈까 벗고 나갈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걸치고 길을 나섰다. 남미의 변화무쌍한 날씨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의 해님과 바람은 내기에 재미가 들린 건지 날씨 가지고 종일 장난을 친다. 옷깃 사이로 따스한 기운이 스몄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더라. 이 거짓말쟁이!
어느 여행지에서나 첫날에는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아레키파에서의 첫날도 마찬가지였다. 미어캣처럼 끊임없이 두리번거렸고, 가시를 바짝 세운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길을 걸었다. 안전지대인지 미처 다 파악하기도 전에 허기가 몰려왔다. 새벽부터 서두른 탓에 식사를 못한지라 배가 고팠다.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음식점이 많지 않았다. 아직 이 도시를 믿지 못했던 나는, 리마에서 가본 적 있는 라루차로 향했다. '안전'을 핑계삼아 여행지에서조차 익숙함을 찾는 자신이 싫었다. 이 감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려 리마에서와 다른 메뉴를 선택했다.
식사를 하는데 메시지가 왔다. 모르는 이름이다. 아레키파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니 본인도 아레키파에 있다고 만나잔다. 여행 단체 채팅방의 내 글을 본 모양이다. 아레키파가 안전지대인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 그녀를 기다리는 장소로 스타벅스를 택했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맛도 그렇고 카페 내부 풍경도 그렇고 한국의 그것과 흡사해도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깔끔하고 표준화된 프랜차이즈의 정석을 보여준달까. 하지만 연달은 익숙함이 달갑지 않았다. 뾰족뾰족 가시를 잔뜩 세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레키파에서 6개월 살았다는 J씨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한국말이 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없어서 외롭고 힘들었다고 했다. 현지 친구들이 형편이 넉넉지 않은 편이라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카페에 가자고 말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러던 중, 나의 아레키파 도착 소식을 들은 것이다. 굉장히 반가웠단다. 그녀 덕분에 아레키파의 맛집, 쇼핑, 관광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안전하니 걱정말라는 조언도!
짧았지만 유익하고 강렬했던 그녀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프리워킹투어를 위해 산타 카탈리나 수녀원 앞으로 갔다. 덥다. 이마에 땀이 맺힌다. 결국 바람막이를 벗었다. 오늘의 승부는 여기서 끝인 것으로. 해님 완승! 열 명 남짓의 사람이 모인 후 가이드의 주도로 자기소개를 했다. 'Hi, Nice to meet you. I'm Choi from South Korea'라는 짧디 짧은 문장을 말하는 그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혼자 그렇게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도 이놈의 외국인 울렁증은 여전하다.
투어는 꽤 알찼다. 100%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하하하. 알아들은 것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아레키파 어원 : 여러 설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이렇다. 잉카제국 4대 토이자 메이타 카팍이 신하들과 함께 이곳의 칠리강을 지나게 되었는데, 신하들이 머물게 해달라고 청원하자 '그러시오. 머무르시오'라는 의미의 케추아어 '아리 퀴페이(Ari qhipay)'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2. 아레키파 기후 : 1년 내내 온화한 편.
3. 아레키파 지리적 특성 : 사방이 험준한 산지다. 지역 자체도 고산지대(해발 2300m)인 데다가 해발 5000m가 넘는 화산 여러개가 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식민시대 때 에스파냐인들이 외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주민 중 인디오(원주민)의 얼굴이 거의 없고 스페인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편이지만, 아레키파 사람들의 자부심은 그 어느 지역보다 강하다고 한다.
4. 아레키파 화산 : 아레키파를 둘러싸고 있는 화산은 3개. 차차니(해발 6075m), 미스티(해발 5822m), 픽추픽추(5669m). 화산의 고도가 워낙 높다보니 산 아래로 비행기가 나는 진귀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아레키파 사람들은 화산에도 성별이 있다고 믿는단다. 차차니는 여성이라고.
5. 알파카와 비쿠나 : 도시 곳곳에 보이는 '베이비 알파카'라는 문구는 아기 알파카에서 깎은 털이 아니라, 알파카에서 처음 깎은 털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한 알파카보다 비쿠나에서 나온 털로 만든 옷이 더 비싸다고 한다.
6. 야나후아라 전망대 : 도시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야나후아라'는 '검정색 속옷'을 의미한단다.
7. 개구리 주스 : 아레키파의 산 카밀로 시장에 가면 개구리와 과일을 함께 간 주스를 판다고 한다. 가이드가 농담으로 던지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진짜였다. 하지만 나는 산 카밀로 시장을 한참 헤맸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스를 파는 가게를 발견하지 못했다.
투어의 마지막은 치즈아이스크림 시식이었다. 작은 가게에서 인디오들이 전통 방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에 '치즈'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식감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치즈는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오리지널, 트로피컬(과일), 피스코사워(페루의 칵테일) 3가지 맛이 있었는데, 피스코사워는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내게 좀 독했다. 인상을 찡그리는 내게 가이드가 웃으며, '당신에겐 독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가이드의 열정적인 설명에 예정했던 것보다 많은 금액을 팁으로 지출했다. 이후 장을 보기 위해 J씨가 알려준 마트로 향했다. 설렁설렁 걸으며 도시를 구경하는데, 중심가를 벗어나니 또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백화점과 마트, 거리에 빼곡한 자동차와 사람들. 정돈된 중심가와 달리 주거지역은 교통체증에 매연도 심하고 뭔가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여행하기에 좋은 곳'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지역은 '살기에 더 좋은 곳'이 되어야 할텐데.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아레키파를 아름다운 백색도시라고만 기억한다. 나 역시 좀 더 걷지 않았다면 마찬가지였을테고.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