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06. 리마에서의 이틀
아팠다. 정말 많이.
Y언니의 추천으로 리마에서는 한인민박에 머무르기로 했다. 무려 방마다 전기장판이 갖춰져 있는 곳이었다. 사실 한인민박은 현지 숙소보다 숙박비가 비싸다. 하지만 여행 정보를 얻거나 동행을 구하는 데 용이해서 생각보다 많은 여행객이 이용한다고 한다. 나는 저 두 개의 이유보다는 '전기장판' 하나 때문에 한인민박을 선택했다. 감기몸살에서 탈출해야 했기에.
사장님은 친절하게 리마의 관광 포인트를 집어주셨다. 감사했지만 죄송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얼른 씻고 쉬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샤워 후 전기장판 위에 배를 깔고 누웠다.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지자 노곤해졌다. 계속 쉬고 싶었지만, 할 일이 생각나 몸을 일으켰다. 캐리어에서 빨랫감을 꺼내 손가방에 옮겨 담았다. 와라스에서 비를 맞은 탓에 무게가 꽤 나갔다. 스마트폰으로 코인빨래방 위치를 검색한 후 숙소를 나섰다.
한국에서도 코인빨래방을 가본 적 없기에 이용 방법을 알 리 없었다. 두 명뿐인 직원은 모두 분주해 보였다. 세탁 비용은 kg으로 책정했는데, 나는 세제까지 포함해서 총 26솔(한화 1만 원 정도)을 냈다. 미라플로레스(Miraflores, 리마의 부촌)라 그런지 보통의 남미 물가보다 비쌌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리 비싼 것 같지 않았다. 여행에서 아끼는 것은 좋다. 하지만 비싸고 싸고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충분히 지불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무조건 깎는 게 옳은 걸까? 흥정은 어디까지 해야 할까? 여행할 때마다 심각하게 하는 고민 중 하나다. 이 빨래방은 정찰제라 해당하지 않았지만.
뽀송뽀송해진 옷더미를 들고 리마 시내로 나갔다. 배를 채울 것이 필요했다. 케네디공원 바로 앞에 있는 라루차(Lalucha)로 갔다. 사람이 많아서 '유명한 곳인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꽃보다 청춘'에 나왔었단다. 페루 여러 도시에 지점이 있는 꽤 큰 음식점이었다. 앉아서 먹을까 하다가 붐비는 게 싫어 포장해가기로 했다. 빨랫감 따로, 샌드위치 따로, 음료 따로, 감자튀김 따로 들고 가야 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직원은 큰 쇼핑백을 챙겨주었다. 사소한 배려에 기분이 좋아졌다.
숙소로 돌아와 샌드위치를 먹은 후에는 이튿날 아침까지 누워서 계속 쉬었다. 열이 내리지 않아서 중간중간 잠이 깼지만 침대에 붙어있으려 노력했다. 전기장판 덕에 이불 속은 절절 끓다 못해 찜질방 수준이었다. 하지만 감기는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리마에서는 '휴식'에 방점을 찍기로 했다. 구시가지에 볼 것이 많다고 해서 가볼 요량이었으나, 더 돌아다녔다가는 귀국할 때까지 감기를 떨치지 못할 것 같았다.
둘째 날 오후에는 와라스에서 잠시 봤던 D씨를 만났다. 수제버거를 좋아한다는 그를 따라 한 식당으로 향했다. 알고 보니 페루의 미식 대통령으로 불리는 가스통 아꾸리오(Gastón Acurio)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아보카도가 들어간 버거에 사이드메뉴로 고구마튀김을 주문했다. 음식을 먹으며 D씨와 여행을 소재로 대화를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최대한 많은 곳에 가봤으면 좋겠어요. 결혼 여부를 떠나서, 나이를 먹을수록 책임져야 할 것이 늘어나는 것 같거든요." 꼰대스러움이 묻어있는 발언 같아서 내뱉은 후 살짝 후회했는데,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고.
감기가 안 떨어져서 힘들다는 내게 D씨는 "약국 가셔서 XX 성분의 약을 달라고 하세요. 좀 나아질 거예요."라고 했다. 의대생인 신분을 활용해 알고 있는 지식을 나눠준 것이겠지만, 이틀 전에 캐리어를 들어준 것도 그렇고 참 고마웠다. 그래서 그런지, 헤어질 때 굉장히 아쉬웠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짧게는 반나절, 길게는 며칠을 각각의 사람들과 함께한다. 정해진 일정 소화 후 각자 갈 길을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후에는 다시 남남이 된다. 앞으로도 반복될 텐데, 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대야 어떻든 간에) 정을 많이 쏟는 성향이라 그런지, 끝을 아는 만남이 무섭다.
약국에 가서 D씨가 알려준 성분을 말했다. 약사는 약을 건네더니 계산기에 80을 찍었다. 80솔이면 한국 돈으로 27000원이 넘는데? 물가를 떠나 생각해도 비싸다. 우선 계산했다. 감기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했으니까. 하지만 몇 걸음 못 가서 약국으로 돌아와 환불을 요구했다. 번역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Reembolso’(환불)라는 글자를 보여줬지만 약사는 못 알아듣는 척했다. 아니, 영어도 아니고 모국어를 못 알아듣는 게 말이 돼? 약을 팔 때는 그렇게 친절했으면서 환불하려니 모르쇠 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환불은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 아니었던가.
우여곡절 끝에 환불을 받았다. 약사는 돈을 건네며 옆에 있는 직원과 스페인어로 구시렁거렸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내 욕을 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한국어로 뭐라 쏴붙이고 싶었지만, 모국 이미지가 나빠질까 싶어 그만두었다. 내가 거듭해서 미안한 눈빛을 보냈는데도 싸늘하게 쳐다보며 흉을 보던 그 약사. 페루의 모든 사람이, 리마의 모든 사람이 당신 같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당신의 태도는 페루와 리마의 이미지에 오점을 남겼어. 내가 스페인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알았다면 그런 응대를 받았을까?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난다.
이제 내 꿈의 도시 아레키파로 간다. 급한 대로 비상약으로 가져온 종합감기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백색 도시의 낭만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도록 부은 편도가 어서 가라앉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