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는 겁 없이 기적수업이라는 상징을 내걸고
진리를 전파하겠다며 인터넷 방송에 얼굴을 내놓고
수업의 가르침을 요약한 컨텐츠를 올린 적이 있다.
헬렌슈크만 박사가
수업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는 걸 보고
내심
’그까짓 거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나는 예수의 음성을 듣고 싶어도 평생 듣지 못하는데! 나 같으면 고무 받고 사명감에 열심히 전파할 텐데!‘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점은 수업의 내용이 즉 예수의 음성이 문자화된 것이기에 예수의 음성을 듣고 싶으면 수업을 펼치면 되는 거였다 과거의 나는 영적인 특별함을 원하는 자아에 동일시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수업 커뮤니티나 단톡방에서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몇몇은 수업의 교사 역할을 하며
수업과 세상의 가르침을 섞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올린 교육 컨텐츠에 태클 거는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그동안 올렸던 심리학 컨텐츠보다 더 많은 ’좋아요‘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두려움에 빠졌다.
기적수업은 세상의 모든 가르침을 부정하기에
종교인과 일반인에게 공격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면서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지나가는 기독교인이 본다면 나는 분명히 욕먹을 거야’
나는 평생을 남에게 욕먹을 짓을 하지 않으려
조심해 왔기에 평생의 습관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기 시작하니, 의연한척했지만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두려움으로 인해 몸이 잠시 아팠다
그리고 자기검열에 빠졌다.
강박적으로 수업컨텐츠가 수업의 가르침과 위배되지 않은지 수시로 살폈다.
올바른 가르침을 위해서 살핀 것이라면 좋았겠지만, 나는 혹시 어떤 수업을 공부하는 학생이
내 컨텐츠를 보고 틀린 점을 찾을까 봐 두려워서
강박적으로 수업컨텐츠를 살피고
문장과 문장의 연결, 내용의 흐름, 조사나 단어 사용의 적절성 등을 살폈다.
그렇게 공들여서 컨텐츠를 만들었건만
내 안의 검열관은 이미 업로드한 컨텐츠를 비난하고 트집 잡았다.
스트리밍 방송을 할 때는
종종 어떤 시청자가 나의 배움이 어느 정도인지
떠보는 질문을 하곤 했다.
나는 그 시청자의 의도가 뻔히 보이고
나를 의심하고 시험하는 게 불쾌했다.
그리고 그 시청자는 은근슬쩍 나의 삶도 간섭했다
안 그래도 개인적인 생각으로 인한
두려움과 자기검열에 빠져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위와 같은 시청자가 잊을만하면 방송에 찾아오니
나는 짜증 났지만 이 경험을 수업의 가르침을
적용하려 노력했다.
‘이 일은 일어난 일이 아닌 걸로 보겠다.
그와 나는 몸이 아니며 그리스도로서 하나이며 신과도 하나이다’
그 시청자가 올 때마다 이렇게 되뇌었다
이렇게 하다 보면 그 시청자가 오더라도 짜증이 나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시청자가 올 때마다 짜증은 점점 커져만 갔다
‘뭘까? 머가 잘못된 거지? 수업의 방식대로 용서했는데’
나중에서야 내가
아직 예수의 수준에 이르지 않았으면서
타인의 시비에도 끄떡없을 수 있다는 오만을 부리고
‘수업의 교사라면 모든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했기 때문에
짜증이 나도 기분 나쁜 시청자를 차단하지 않아
고통이 지속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아직 자아와 동일시를 완벽히 해제한 수준은 아라는 걸 받아들이고
아무리 나를 찾아와 나의 적적함을 달래주는 시청자라도 나애개 의심을 품고 있으면 내가 아무리 그의 질문에 답해도 그는 의심할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다
의심하는 자는 의심하기 위해 듣는다
그 후 시비조의 시청자들은 모두 차단했다
그러니 방송에는 한류드라마의 영향으로 동양인 남성에 관심을 보이는 외국 여성들만 들끓었고
그 여성들은 나의 전하고자 하는 수업의 가르침에 전혀 관심이 없고 나에게 사적인 질문만 계속했다. 나는 원치 않는 질문을 듣고 같은 대답을 하는 걸 반복하게 되자. 방송이 싫어졌다.
심지어 시청자 몇몇은 내게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광적인 집착을 보였다.
그 후 방송을 이어가다
너무 힘들어서 방송을 잠시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