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심리학을 배울 때 애착이론에 꽂혀서
전문서적을 구해서 읽었던 적이 있다.
그 두꺼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폭력을 보호행위로 착각하는 동물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해리 할로우의 원숭이 실험에서, 새끼 원숭이에게 ‘악한 어미’ surrogate를 주었다.
이 어미는 새끼를 세게 흔들거나, 공기를 뿜어 밀쳐내거나, 날카로운 못을 내밀어 찌르거나, 심지어 새끼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장치였다.
보통이라면 새끼가 도망쳐야 정상인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폭력을 당할수록 새끼 원숭이들은 그 어미를 더 꽉 붙잡고, 더 절박하게 매달렸다.
어미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폭력을 ‘나를 지켜주려는 행동’으로 오해하거나, 아니면 그게 유일한 접촉의 원천이라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폭력은 이렇게 사랑의 행위로 느껴지게 된다.
‘매를 번다’는 표현이 있다
왜? 매를 벌지? 매 맞는 건 누구나 싫어하는 거 아니야?
이건 어릴 적에 했던 생각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된다.
‘매를 번다’와 ‘일탈을 한다’는 목적이 같다.
일탈은 처벌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고
처벌을 받고 싶은 이유는
처벌을 사랑받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착각이 일어날까?
그냥 바로 사랑을 받으면 편한 거 아니야?
번거롭게 일탈을 안 해도 되는데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는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 들이는 노력보다
과거의 사랑을 연상시키는 일탈을 하는 게 더 쉽다
사람들의 관심(과거 양육자의 사랑을 연상시킴)을 받기 위해
관심 좀 주라고 말하는 것보다
몸을 멋지게 만들고
옷을 예쁘게 입는 게 쉽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사랑해 달라고 말하는 것보다
관심받는 게 더 쉽다
과거 나는
관심 받기 위해
옷을 신경 써서 입고
뱃살관리하면서
인간적인 사랑(접촉과 보호)을
내게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매었는데
이젠 나는
내가 사람들의 관심과
인간적인 사랑에 만족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게을러서져서 예전처럼 애쓰기도 싫다
게을러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을 받으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결핍감이 일어나는 원인을
해결하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됐다
사랑에 대한 판단이 없으면
사랑은 좋고 나쁜 게 아니게 되어
없어도 아쉬움이 안 생기고
있어도 사라질까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사랑(접촉과 보호)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고 본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구하려 나서지도 않는다
이러면 마음이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