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끝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점막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습도와 시리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온도의 공기. 딱 좋다. 어느새 한증막 같은 더위가 가시고 보송한 니트가 살결에 닿아도 꽤나 기분 좋은 날씨가 찾아왔다.
'이번 여름 꽤 더웠지... 한국에서 계속 사는 게 맞는 걸까?'
한국은 왜 사계절이 있는 걸까? 이대로 지구 온난화가 계속된다면 우리나라 기후도 동남아의 우기와 건기처럼 바뀐다던데... 또다시 생각의 굴레로 들어가던 차였다. 주인 놈은 오늘도 어김없이 잡생각이 많네. 아마 유미의 세포들처럼 뇌세포에도 자아가 있다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겠지.
도로 갓길에 널브러진 낙엽들을 응시하며 멍하게 걷다 영은 생각을 멈추기 위해 으슥한 건물 사이 골목길에 잠시 들렀다. 편의점에서 흔히 파는 700원짜리 싸구려 라이터를 꺼냈다. 누가 꺼뜨릴세라 소중하게 손으로 감싸 불꽃을 하나 피우고 담배 한 줄기 꼬나물었다. 은은한 담배향이 한줄기를 타고 퍼져나갔고, 내쉬는 숨에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연기들처럼 자질구레한 생각을 지워나갔다.
영은 N번째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느샌가부터 몇 번째 남자친구인지 헤아리는 것도 포기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 책장에는 전 연애사가 꼼꼼하게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샌가부터 책장에 새로운 책은 채워지지 않았다. 더 이상 책을 쓸만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점점 부질없다고 생각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둘 다인 건지.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도 너무 많았지.'
진득한 연애를 줄 곧 해오다 솔로가 된 지 5년쯤 지났다. 진득하다고 해봤자 1년 이상의 연애이지만. 그동안 연락하는 사람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랑의 작대기가 허공을 맴도는 불상사는 늘 일어났다.
둘 중 어떠한 사랑도 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을 알려면 4계절을 봐야 한다는 신조를 뿌리 깊게 가지고 있던 영은 그 신조를 버린 지 오래다. 그럼에도 100일 남짓의 짧은 연애는 책장에 구태여 밀어 넣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적, 아마 기억하는 바로는 유치원 때부터였을 것이다. 늘 그렇듯 형식상 담임 선생님께 적어내는 장래희망에는 과학자, 수의사, 외교관과 같은 직업들을 써내놓았지만 사실 영의 진짜 꿈은 따로 있었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꿈이라. 혹은 서류상 적어낼 만한 칸에 글자수가 부족하여 이런저런 이유로 입에 올리고 살지 않았던 꿈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평생을 하는 것. 나에게 꼭 맞는 배우자를 찾아 서로의 곁을 지키며 나이 들어감을 서로 애틋해하며 그렇게 늙어가는 것.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건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더더욱 그랬다. 직업적인 면에서도 그랬지만, 사랑에선 더 박했다. 20대 후반까지도 열정적으로 잘 맞는 짝을 찾아 헤맸지만, 사소로운 것들이 발목을 잡았다.
사소로운 것들.
어쩌면 문제의 원인은 나일지도 몰랐다. 영은 이제는 정말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장에서 오래된 책들을 하나 둘 끄집어 정독해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