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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a May 20. 2022

살아남은 그림들

조상인




우리의 시대는 흔들렸다. 누군가는 시대와 함께 흔들렸고, 누군가는 흔들리는 시대에 희망을 담아 춤을 추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를 부지런히 그려냈다.


우리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근현대 작품들은 그야말로 '살아남은' 그림들이다. 전쟁 속에서 포탄에 맞고, 빼앗기고, 사람들의 불쏘시개 따위로 쓰이던 많은 종이들 중에 간신히 살아남아 작품으로 남았다. 그렇게 우리 앞에 선 그림들은 그때 자신들이 보았던 장면들을 보여준다. 나라를 빼앗긴 비극을, 가족을 잃은 슬픔을, 때로는 그 속의 작은 희망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 그때의 모습을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한국 전쟁과 일제강점기는 사람들을 절망이라는 하나의 구덩이로 밀어 넣었지만, 그들은 그 절망 속에서 각각의 예술을 창조해냈다. 윤형근은 시대의 억압에 대한 절망을 그렸고, 김환기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유영국은 흔들리는 시대 속에 절대 흔들리지 않는 산을 묵묵히 그렸다. 하지만 각기 다른 그림이라도 그들을 오래 보고 있으면 억울함과 비통함이 새어 나온다. 그것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표정이다. 전쟁은 늘 저런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근현대 미술을 사랑하는 이유는 겪어보지 못한 감정에 대한 감동이 아닐까. 혹은 글로는 미처 기록되지 못한 그 시대의 감정을 담아낸 유일한 기록 이어서일까. 그 어떤 역사에도 살아있는 감정을 그대로 담아낸 기록이 없다. 오직 예술뿐이다.




찍고 테 두른 김환기의 점들에는 구구절절 그리운 사연이 흐른다. 하늘을 닮은 특유의 푸른 색조는 이상적인 것이 천상의 분위기를 이룬다. 반면 윤형근의 그림은 땅에 발을 딛고 흙에서 솟아오른 검은빛이다. <윤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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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고향을 생각하며 찍은 점들은 밤하늘의 별 같고, 맨해튼의 불빛 같으며, 찰랑이는 바다 물결 같기도 하다. 실제 그림을 보면 점은 그냥 점이 아니라 그리운 이의 눈동자다. 단번에 찍은 게 아니라 한 번 찍고 그 번짐과 울림을 관찰하며 또 찍고 바라보다 마르면 또 찍기를 예닐곱 번 거듭해 점 하나가 완성된다. 어떤 눈은 기뻐서 울고 어떤 눈은 서러워 울고, 어떤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하고 어떤 눈은 기쁨으로 충만하다. 물론 개중에는 원망하는 눈동자, 외면하는 눈동자가 없으랴만.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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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미술관에는 두 사람을 닮은 나란한 소나무 두 그루가 높이 뻗어 있고, 별관의 이름은 그 옛날 성북동 신혼집 이름과 같은 ‘수향산방’이다.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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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예술가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지만 바로 그 절망의 지점에서 새로운 작업의 동력이 생겨나곤 했다. <박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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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색은 고향의 색이요, 황금색은 풍요의 색이며, 갈색은 자연의 색이다. <변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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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요동칠수록 절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무언가가 절실하다. 그런 묵직함이 산만 한 게 또 있으랴. 꽃은 피고 지고 사람은 들고 날지언정 산은 늘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분명 그럴 것이다. <유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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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 추상, 구상 모두 존재한다.” <김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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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지으면 형상 없는 그림이 되고, 그림을 그리면 말하지 않는 시가 되어야 한다.” <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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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우가 평생을 보여준 갈라짐과 찢김의 미학, 바름과 겹침, 스밈과 배임의 미학은 우리 근현대사의 큰 틀에서 다시 봐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권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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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언어의 부호인 문자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자유가 없다. 문자의 노예가 된다.” <서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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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그린 유화의 불투명함과 달리 동양적 재료들은 투명함을 품고 있어 머금고 들어갈 공간의 여지를 가진다. <곽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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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함은 예술의 순수한 원형을 상징한다. 산에서 베어다 손질하지 않은 것 같은 이 통나무 의자 따위의 소박함이 현명함을 넘어서서 그 어떤 인간의 본질을 느끼게 한다.” <권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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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붙은 그림이 파르르 떨린다면 그것은 작품과 관객 사이를 가로지르는 진동이요, 교감이다. <이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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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침묵 속에 길을 내주는 등대다. 침묵은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고도 매혹하는 경이로움이다. 조용한 그의 그림은 우렁찬 침묵이다. <이우환>



<살아남은 그림들 - 조상인 > 22.04.30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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