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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a May 26. 2022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억압은 한계이자 무한한 창조의 시작이다.

시대는 여성의 사랑을, 그림을, 음악을, 그리고 삶 자체를 억압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억압은 어두운 곳에서 여성을 노래하게 하고, 사랑을 창조하고, 서로를 그림으로 담았다. 어두운 곳에서 작게 빛나던 촛불이 점차 번져 타오르듯 여성들은 서로 연대하고 창조해냈다. 끝내 그 불이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꺼져버릴지라도.



"오, 모든 망자의 집이자 저승을 주관하는 자들이시여, 제 아내를 찾고 있습니다. 그녀는 독사에 물려 젊음을 도둑맞았습니다. 간청하오니 너무 일찍 끊긴 운명의 실을 고쳐주소서."


"오르페우스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그걸 어기면 끝이다."

두 사람은 짙은 정적 속에서 가파르고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어두운 길을 걸어갔다. 이승과 그리 멀지 않은 저승 끝에 다다랐을 때 아내를 잃을까 봐 겁났던 오르페우스는 못 참고 고래를 돌려서 그녀가 뒤에 오는지 봤다. 아내는 팔을 뻗어 남편을 안으려 했지만 그 안타까운 손은 허공만 잡을 뿐 다시 죽은 그녀는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사랑이 무슨 죄겠는가.


세 여자는 불 앞에 나란히 앉아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오르페우스의 사랑은 두 사람을 모두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오르페우스는 이승으로 올라가 평생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았고, 아내는 그의 선택으로 두 번째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에우리디케는 그저 오르페우스의 돌아봄으로 운명이 결정됐을까. 그녀가 스스로 오르페우스를 돌아보게 한 것은 아닐까.


정혼자가 있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은 자체로 비극적이지만 그들은 그 비극을 스스로 선택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지상으로 올라가던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부르기를 '선택'했고,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바라보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마리안느는 연인의 삶이 아닌 화가의 삶을 살고, 엘로이즈는 정혼자와의 삶을 산다. 비록 평생을 그리워 살겠지만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삶을 살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해방이자 해답이었다.



1악장

찌는 듯한 여름 햇살 속에서 사람과 동물은 활기를 잃고

나무와 풀도 타들어간다.

뻐꾸기가 지저귀고 산비둘기와 방울새가 노래한다.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자 북풍이 산들바람을 덮치고

양치기는 자신의 불운과 갑작스러운 폭풍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나.


2악장

천둥 번개에 놀락 파리와 호박벌에 시달려

양치기의 팔다리는 편안하지 않네.


3악장

아, 그의 두려움은 얼마나 옳은 것이었던가!

천둥과 번개와 우박이 잘 여문 곡물의 이삭을 상처 입게 한다.



영화 중반과 마지막 장면에 연주되는 비발디 <사계 여름 3악장>은 여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두려움을 노래하고 있다. 찌는 듯한 햇살은 세상의 활기를 빼앗고, 폭풍이 불고, 천둥과 번개와 우박이 상처를 남기고 간다. 여름의 낙천은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다. 철없이 새 생명을 피워내고, 투정에 누구든 활기를 잃는다. 아마 그들의 사랑은 사계절 중 여름이었으리라. 끝내 여름이 끝나 가을에 낙엽을 떨어트릴 것을 알지만 철없이 피워내고, 뜨겁고, 투정 부렸다. 그들이 겨울을, 비극적인 사랑을 두려워했다면 그렇게 뜨겁게 타오를 수 있었을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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