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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a May 15. 2022

아무튼, 피아노

김겨울



나의 피아노에 대한 첫 기억은 아마 누구와도 비슷하게 초등학생 시절쯤이었던 것 같다. 여자 아이들

대부분 피아노를 배웠고 나도 그랬다. 대부분이 치는 곡을 쳤고, 대부분이 가는 시간에 맞춰 학원을 가고, 대부분 그랬듯 사과를 두 개씩 채웠다. 그래서 나에게는 피아노는 '내 것' 보다는 '남의 것'이었고, '배우고 싶은 것'이 아닌 '배워야 하는' 영역으로 남겨져 있었다. 


모든 비극은 의무에서 시작된다. 남이 이미 다 걸어온 길을 걸어야만 하는 일은 주변을 둘러보게 하는 여유도 흥미도 유발하지 않는다. 피아노 레슨을 '순서대로' 듣는 것은 피아노를 잘 칠 수는 있겠지만 음악이 말해주는 이야기를 듣기 힘들고, 그림을 '정해진대로' 그리는 것은 그림을 잘 그릴 수는 있지만 나의 감정을 화폭에 표현하기 어렵고, 글을 '법칙대로' 쓰는 것은 글을 잘 쓸 수는 있지만 누군가를 울릴만한 글을 쓰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배우고 싶은 것이 생기면 배우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다. 대신 이렇게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이 걸었던 길을 따라오라는 말이 아니라 길에서 마주쳤던 풍경과 경험을 말해주는. 그럼 나도 그 길을 따라 그 장면을 엿보고 싶기도, 그 사람은 보지 못한 다른 풍경을 발견하고 싶어 진다.




터치마다 묻어 나오는 습관과 연주자가 해석한 곡의 분위기가 마치 지장처럼 찍힌다. 그건 정말로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하다. 각자가 각자의 마음과 몸으로 각자의 피아노를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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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어쿠스틱 피아노의 매력이자 나의 두려움이다. 내가 상상하는 소리를 내기 위한 힘과 속도와 터치의 온갖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 내가 소리를 띄우고 싶으면 위로 퍼져 나가는 소리가, 깊게 깔고 싶으면 바닥에 깔리는 소리가 정직하게 난다는 것. 가끔은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솔직한 악기라는 것. 나의 확신 없이는 희미한 소리만 웅얼대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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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함께 흐르는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음악이 곧 호흡임을, 박동임을, 몸의 흐름임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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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예상할 수 없으며 끝나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는, 하나의 살아 있는 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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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나를 속일 때 얼마나 많은 시간을 후회의 몫으로 남겨두게 되는지를 배웠다. 어떤 순간에는 내가 나를 속이지 않고서는 삶을 견딜 수 없다는 사실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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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클래식 음악이 내가 가진 마지막 벽이라고 느낀다. 내가 가진 유일한 마음의 집이 활활 타올라 서까래마저 불타 없어져도 홀로 불타지 않는 벽. 노래에도, 말소리에도, 대화에도, 그 어떤 것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지친 몸을 끌고 가서 털썩 주저앉으면 기댈 수 있는, 푹신한 소파는 못 되지만 결코 무너지지는 않는 든든한 벽. 거칠고 두꺼운 벽에 머리를 기대면 나보다 먼저 기쁘고 슬펐던 일들이 온갖 소리로 나를 지탱해준다. 이 벽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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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아노를 배울 때도 춤을 출 때도 클래식 피아노와 클래식 발레에 어떤 고향과도 같은 느낌, 본능적인 노스탤지어를 느끼는데, 단지 규칙 안에서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둘 모두 불가능한 완벽을 향해 불완전한 시도를 계속해나간다는 점이 나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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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서는 특수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 이성은 자연 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물리칠 수도 없고 그의 전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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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면 불행해진다. 그 '다른 사람'에는 과거의 나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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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는 일종의 문학책, 혹은 일종의 암호이고, 편지이며, 일기이고, 몽상이다. 해석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 속에서 읽혀야만 하는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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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언어 없는 언어, 잘게 쪼개진 의미를 실어 나르는 대신 감정을 열어놓는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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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리듬이고, 호흡이며, 보이지 않는 선율이다. 책을 읽을 때 음악을 듣지 않는 이유는 단지 계이름이 들려서가 아니다. 글의 프레이징과 음악의 프레이징이, 글의 구조와 음악의 구조가 서로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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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일이란 다른 사람에게 나의 일부를 떼어내 전달하는 일이고, 그 이전에 침묵의 시간만이 나를 정의할 수 있으며, 듣는 시간만이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듣기를 멈추지 않아야 하고, 듣기 위해 침묵해야 하며, 침묵의 힘으로 말해야 한다. 더 자세히, 더 세심히, 더 온전히 들어야 한다.



<아무튼, 피아노> 22.05.07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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