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받아들이는 것도, 굳건히 서 있는 것도 일상의 몫이다
역시나 재미없는 프랑스 영화였다.
파리 도시의 풍경, 한적한 시골 풍경과 프렌치 쉬크를 몸소 보여주시는 이자벨 위페르와 몇몇 매력적인 배우들이 영화를 채우고 있지만 스토리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조용하다. 그리고 주인공이 마주하는 일에 비해 그녀의 감정선과 그녀가 그 일을 감당해내는 자세 역시 분주하지 않다.
주인공 나탈리는 고등학교 철학 교사이다.
급진적이지도, 극보수도 아닌 중도의 의견을 가지고 있는, 왕년에는 어떨런지 몰라도 지금은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변화가 더 좋은 그녀이다. 그만큼 그녀의 삶도 안정되어 있다. 널찍하고 따뜻한 아파트에 살며, 교수 남편, 다 자란 아이들, 이제 선생님과 의견을 달리하며 토론할 만큼 키워낸 제자도 있다. (잘생기고 똑똑한 제자..)
그녀의 삶을 다소 무겁게 하는 것은 불안증에 시달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어머니 정도이다.
그래서 그녀는 영화 초반 내낸 능숙하다.
파업하는 어린 제자들의 반항기 어린 모습도 능숙하게 대처하고, 오랫동안 작업해온 교과서 개편 일 회의도 하며, 제자를 만나 일상적이면서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며 남부럽지 않은 일상을 살아간다.
그런 그녀의 삶에 예상치 못한 스토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남편의 외도이다.
할말이 있어 나 다른 여자 생겼어
뭐라고? 왜 나한테 그걸 말해 혼자 묻어둘 순 없었어?
그 사람이랑 살꺼야
뭐라고? 진짜야?
그래 진짜야
언제부터 그랬어?
좀 됐어
학생이야?
아니야
그러면 누군데?
당신은 몰라
평생 날 사랑할 줄 알았는데...내가 등신이지..
남편의 외도를 알고난 후에 그녀는 오히려 초연한 척 하며 꿋꿋이 혼자 슬픔을 이겨낸다.
제자와 만나 속 얘기를 하던 나탈리는..별일 아니야. 삶이 끝난 것도 아니고.. 라고 읊지만 눈물을 흘린다.
(사실 이 부분부터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괜한 상상을 하게 한다. 혹시 이제 저 제자랑 잘 되는 거 아닌가? 영화이니 영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겠지?)
남편과 해마다 휴가를 보낸 브르타뉴의 시고 별장에 들러 마지막 휴가를 보내며 자신의 짐을 챙기며 홀로 훌쩍 거린다. 괜히 안터지는 전화기에 분풀이를 하기도 하면서...
남편의 외도 후 불안증에 시달리던 어머니 마저 돌아가신다. 그리고 자녀들도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교과서 개편 작업도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오롯이 혼자 남은 나탈리는 이제 자유의 몸이 되어 시골 별장에서 책을 쓰며 유유자적 공동체를 꾸려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제자에게 찾아간다. 감독의 의도인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슬슬 궁금해진다. 그래 이토록 다 떠나버린 그녀의 곁에 이제 새로운 누군가가 생기는 것일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판타지를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감독이 단호하게 판타지를 거절한다. 문득 아침 제자와의 말다툼을 한다. 젊은 제자는 그녀를 참여하지 않는 지식인, 부르주아 라 쉽게 평하고 그런 그의 태도에 자신이 그런 존재로 평가받는 다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더불어 제자가 다른 친구와 연인 사이가 되어 꽁냥꽁냥 장난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홀로 방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갑자기 홀로 남은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건지, 혹은 젊음을 바라보다 유난히 자신이 초라해졌는지. 혁명적이진 않지만 꿋꿋한 삶의 대한 태도가 무심하게 평가당해서인지...알 수 없는 울음이긴 했다. (감독은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그러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참 이상하게도 빈자리가 있으면 누군가로 채워지듯 그녀에게 손녀가 생긴다. 다시금 행복감을 느끼는 나탈리의 얼굴을 볼 수 있다. 학기가 시작되고 파업이 끝난 학생들에게 늘 그렇듯 행복에 대해 철학에 대해 가르친다. 이상하게도 이런 일련의 사건과 감정 속에 그녀는 더 단단해져 보인다.
모든 일들이 별일 아니라는 듯 꿋꿋이 감당해내고 바뀌어가는 삶의 지형에서 제 자리를 잡아간다.
그녀는 다시 제자의 별장으로 찾아간다. 고양이를 맡기러.
그리고 다시 제자와 예전 처럼 가벼운 농담도 하며 흐트러진 관계를 다시 바로 잡는다. 짧은 비쥬와 함께 안녕을 고하고 담배를 태우며 별장으로 돌아오는 제자의 착잡한 표정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 제자도 사랑이었는데 표현을 안한 것이다. 아니다 제자는 그냥 착잡했을 뿐이다 라며 같은 팀원 분과 얘기를 나누곤 했는데, 다시 그 장면을 돌려보아도 답은 잘 모르겠다. 관객인 우리가 맘대로 정해야 할 뿐)
나탈리는 이제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가족들을 위한 따뜻한 크리스마스 식사.
사실 정말 재미없는 영화이다.
로맨스도 없고,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으며 음악도 조용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정말 건조하다. 지루한 철학가의 인용도 난무하다. 그래도 괜히 허무해질 때가 오면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처연하게 그 자리에서 내게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을 맞이하고 눈물이 나오면 쏟고 괜찮아지만 그 감정의 잔재들은 흘려보내고 흐트러진 관계가 있다면 바로 세우는 작업들을 하며 살아가는 것.
별일 아니야 라며 보내버리는 것. 삶이 끝난 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이자벨 위페르는 점점 멋있어 지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