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철학의 원리"에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일생에 한 번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라는 말도 남겼다 한다. 인공지능 시대에서도 너무나 군더더기가 없는 말들이다. 당시 여전히 철학과 진리의 중심에는 '신'의 존재가 있었는데, 데카르트는 무엇이 참이며 진리이고, 무엇이 절대 불변의 확신할 수 있는 진리인지를 찾기 위해서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인간 그 자체로 철학의 중심을 옮긴다. 데카르트는 철학의 제 1원칙을 '신'에서 '인간의 이성'에 두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주체로써 인간을 철학의 중심에 두려 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려 했던 그는, 마지막에는 의심하면서 생각하는 자신을 부정할 수는 없었고, 생각을 하는 행위 자체가 존재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불변의 진리라고 결론내린 듯 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이다.
성철 스님께서 1981년 조계종 종정 취임식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중국 송나라 때 청원유신 선사께서 하신 말씀이시라 한다.
노승이 서른 해 전에는 선(禪)을 배우기 전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니, 후에 선(禪)에 대한 지견이 있어 친히 들어오게 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더이다. 지금에 이르러 쉬는 곳을 얻어 보니, 여전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이다.
산과 물을 그저 산과 물로 보는 것, 즉 산과 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없애는 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과정이라 여겼던 것이다. 여기서 '생각을 없애는 것'은 단순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주관적인 관념과 분별심을 내려놓는 것을 뜻한다. 사실, 의학적으로 생각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뇌는 생존과 기능 유지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신경 활동을 한다. 이 활동의 결과로 감각, 지각, 기억, 사고, 감정 등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물리적으로 뇌 활동을 '정지'시켜 생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종교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생각을 없애는 행위는 끊임없는 수행과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려운 과정인 셈이다.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라 붙잡는 것
생각은 성철 스님 정도의 수행과 자기 성찰이 없다면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안해야지 해서 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생각은 그냥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이고, 붙잡지 않으면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순간순간 스쳐지나가듯 잠시 언뜻 떠오르는 그 생각들을 붙잡아두기 위한 '기록'이라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여겨진다. 불쑥불쑥 인지하는 생각들에 대한 메모 형태로의 기록은 휘잉 지나가는 생각을 고정시켜두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글자나 음성으로 기록된 것들은 더이상 지나가지 않고 볼 때마다 들을 때 마다 다시 끄집어내어서 '생각'이라는 형태로 다시 변환시킬 수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은 너무 중요하다. 인간의 생각은 결국 뇌 활동의 결과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 맡는 모든 감각 경험부터, 기억하고, 배우고, 추론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이 뇌의 복잡한 신경 세포들의 상호작용과 전기화학적 신호 전달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생각만으로 생화학적 반응과 결과물이 생성되도록 하여서 몸이 반응하게 만들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레몬을 먹고 있다는 상상만으로 침이 고이게 할 수도 있고, 운동 선수가 경기를 앞두고 성공을 시각화하는 것은 실제로 근육 활성화를 이뤄낼 수가 있고, 부정적인 생각은 코티솔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여 심박수 증가, 혈압 상승, 소화 불량 등 신체적 부정적 증상으로 나타나게 할 수도 있다. 이렇듯 청각, 촉각, 시각, 후각 같은 외부 자극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생각'과 같은 내부 생화학 활동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몸은 반응하고,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끊임없는 생화학적 변화를 통해서 일어나는 '생각'은 또다른 생화학적 결과와 함께 쉼없이 스쳐지나가게 된다. 긍정적 결과는 긍정적 생화학 반응에 의한 것이고, 긍정적 화학 반응은 특정한 생화학적 반응 환경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면,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자연스러운 반응에 의해서 긍정적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화학적 환경을 촉각, 미각, 후각 등의 외부 자극이 아닌, '생각'이라는 내부 자극을 통해서도 조성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운 인간 신체의 신비처럼 느껴진다.
어차피 '생각'이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스리는 편이 훨씬 이로울 것이다. 이 세상에서 호흡하고, 존재하고, 살아있기 때문에 매 순간 만들어지는 '생각'이라면, 지나가는 생각의 흐름을 긍정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방향으로 작은 돌덩이 던져 미세한 파동을 일으켜 보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
'기록'은 빠르게 흘러가는 생각을 고정시키고, 물리적인 형태로 존재하게 함으로써 나중에 다시 꺼내어 보고, 듣고, 다시금 그 생각을 떠올릴 수 있도록 돕는다. '기록'이라는 물리적 형태는 외부 자극이 되어서 "지나간 생각"이라는 내부 자극을 다시 생성해 낼 것이고, 이것은 작은 파동이 되어 쉼없이 흐르는 현재의 생각 흐름의 방향을 긍정적 방향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기록은 생각을 형상화시킨 것
뇌 속에서 일어난 생화학적 반응인 '생각'을 외부로 꺼내어서 하나의 물리적 형상으로 구체화시킨 것이 '기록'이다. 그래서, '기록'은 내부 자극으로 전달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일컫는 것이다. 추억이 담긴 노래, 종이에 적어둔 메모, 휴대폰에 녹음한 음성, 사랑하는 이와 함께 먹었던 맛있는 음식 냄새. 이 모든 것들이 '기록'이다.
'기록'은 물리적 형상이다. 그래서, 세월 속에서 그 형상의 변화 또한 당연한 이치일 수 있다. 그런데, 그 형태에 전혀 변화가 없는 무한한 물리적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 기록이라면 어떠할까? 또한, 우리의 생각, 우리의 물리적 행동 등. 우리의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사물인터넷. 4차 산업 시대에서 또하나의 영역으로 엄청난 하드웨어 발전을 이루어내고 있다. 사물에 인터넷이 붙었다라는 것은 그 사물이 무엇이건 엄청난 데이터로 '기록'이라는 것을 해서 드넓은 "정보의 바다"라는 네트워크에, 기록된 디지털 데이터들을 던져버릴 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인터넷의 발전과 함께하는 수많은 센서들은 '기록'이라는 행위에 대한 한계를 없애고 있다. 센서를 통한 데이터 형태로의 모든 기록은 클라우드 데이터베이스와 만나게 되면 무한한 형태의 물리적 기록이 되어버린다.
흘러가는 찰나(刹那)의 우리의 생각을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하거나, 종이에 메모해서 스캔하거나, 육성으로 녹음을 해서, 디지털 데이터로의 '기록'을 통해서 네트워크 바다에 던져버리고 특정 데이터베이스에 보관이 되도록 한다면 우리 몸 속 생화학 반응에 따른 '생각'이라는 놈은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되어서 외부에서 보관이 되게 된다. 드디어, '생각'이라는 놈을 가둬버렸다. 이제 '생각'을 필요에 따라서 끄집어 내고 내부 자극을 통해서 나의 생각의 흐름을 긍정적 방향으로 변경시키는 일만 남았다.
생각이라는 데이터
'생각'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데이터'라는 실존적 물리 형상으로 만들어버리면 '생각'은 더이상 관념적 대상이 아닌 하나의 객체,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생각'을 데이터화시켜서 데이터베이스에 기록시키는 순간 영구적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생각'이라는 놈을 언제든지 꺼내어서 외부 자극제로 잘 활용한다면 나의 내적 생각 흐름을 긍정적 방향으로 조절할 수도 있을 듯 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센서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한 개인이 생성하고 감지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단순히 숨 쉬는 횟수, 걸음 수, 칼로리 섭취 및 소비량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수많은 생체 신호, 환경 정보, 행동 패턴 등이 센서를 통해 디지털화되어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 한 명의 개인이 하루에 생산하는 데이터의 양은 실로 엄청나서 수십에서 수백 기가바이트(GB)에서 나아가 테라바이트(TB), 혹은 1000조에 해당하는 페타바이트(PB) 조차도 넘어서 엑사(EB), 제타(ZB), 요타바이트(YB) 단위까지도 도달할 수 있어서 그 수는 가늠 자체가 되지 않는 영역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당 200~300조 연산 수행이라는 엄청난 처리 속도를 자랑하는 GPU의 발전과 심지어는 더 나아가서 병렬 연산 방식의 양자 컴퓨터까지 그 활용성이 높아진다면 요타바이트(YB) 라는 현재로썬 상상할 수도 없는 데이터 처리양이 실현 가능한 기술 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한 명의 인간이 평생을 통해 만들어내는 데이터에 대한 영구적 보관도 현실적인 범주 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생각을 그리다
어떤 방식이도 상관없다. '생각'이라는 찰나(刹那)를 '메모'라는 이름으로 기록해야 한다.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1차원적 목적이어도 상관없다. 나의 찰나를 마치 나의 물건처럼 보관만 할 수 있다면 나의 의식이 살아있는 한, 나의 생각이 끊임없이 생성되어서 결국 내가 존재하고 있는 한 내꺼, 나의 일부분인 '생각'이라는 물건을 보관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모여서 결국 '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 가능한 데이터는 '자료'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가늠할 수 없는 양의 빅데이터는 그냥 숫자들의 나열일 뿐이고, 그냥 두면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빅데이터는 시각화가 중요하다. 그래서, 빅데이터는 체계적인 통계 분석을 통한 패턴화가 중요하다. 작은 크기의 사각형인 픽셀이 모여서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서 우리가 보고, 형체를 확인해 볼 수 있게 되듯이, 작은 단위의 데이터를 규칙에 맞게 정리하고 시각화를 하게 되면 비로소 '내'가 보이게 된다. 이러한 분석을 위해서는 결국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 역시 티클이 모여서 태산이 되는 격이다. 데이터를 모으기 위한 '기록'은 이러한 이유로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기록'의 대상은 그냥 나의 전부가 될 수 있다. 분석하고 싶은 데이터의 전부이다. 비록 티끌이라 할 지라도. 엄청난 양의 데이터일 것이다. 상관없다. 인공지능이 있다. 그래서, 인공지능은 나의 일을 대신해 주는 기계가 아니라 나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나와 함께 하는 비서이자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결국 생체(生體)다. 살아움직이는 세포들의 집합체이기에 매시간 변화된다. '기억'이라는 것은 결국 뇌에서의 생체 기록이다. 기록된 생체의 모습은 당연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 모습이 변화되며 희석되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라는 영구적 기록을 기반으로 논리적 전개와 추론 능력까지 갖춰버린 인공지능과의 대결에서 인간은 절대 승리할 수가 없게 된다. 아니, 인간을 이겨먹을 문명의 이기(利器)를, 인간이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님은 너무나 자명(自明)하다. 그렇기에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절대 이길 수 없는 인공지능과 대결이 아닌 함께를 고민해야 하고, 종국에는 데이터베이스라는 기계일 뿐인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도구로 활용되어야 진정한 이기(利器)가 될 수 있음도 반드시 인지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록'을 한다.
생각이 흐르고 사라지지 않도록.
그리고 언젠가, 그 생각들이 모여 ‘나’라는 존재를 마주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