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어떤 사람이 상대방의 심리 상태를 교묘하게 조작하여, 상대방이 스스로를 불신하고 가해자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심리적 학대 행위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상대방이 주위의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고립되게 만들고, 결국 피해자는 가해자의 말만을 신뢰하게 되어서 가해자에 의한 심리적 지배 상태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매우 과격한 표현일 수 있겠으나, 오늘의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무려 12년을 가스라이팅 되었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싶다. 가해자는 학교, 학원이고 성적만이 절대적 가치가 되어서 스스로의 생각이나 의견은 무시당한채 왜 해야 하는지, 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는지, 좋은 성적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 성적을 받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그 어떤 고민도, 그 어떤 가치관도 없이 성적표라는 종이에 적힌 숫자를 줄이기 위한 노력만을 한다. 마치, 눈가리개가 씌워진 경주마처럼 오로지 한 곳만을 바라보며 무작정 달리는, 심지어 경주마도 아닌 조랑말 같다. 입력된 코드에 따라서 그 명령만을 수행하는 어설픈 기계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성적만이 절대적 선(善)이기에 다른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스러워 스스로를 추스린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이겨내고 다른 생각을 하려 한다면 그것에는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어디 감히”라는 틀에 막혀서 되돌아오는 메아리와 함께 이내 용기낸 자신을 원망하며 희망의 불씨를 결국에는 꺼버린다.
그런데, 이 가스라이팅은 제법 많이 위험하다. 왜냐하면, 가해자의 실체가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이다. 또한, “공부를 잘해야 잘먹고 잘산다”라는 완벽한 사회적 명분도 가지고 있다. 무엇이 공부인지, 무엇을 위한 공부인지, 그리고 왜 잘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 친절한 설명도 없는데, 이 어설픈 명제는 완벽한 명분이 되어서 아이들을 옥죄고 있다. 또한, 피해자도 여럿이어서 마치 "집단 최면" 같은 성격도 가지고 있기에,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디까지가 그른 것인지, 심지어 그른 것이 있기는 한건지도 모른체 경주마가 되어서 달린다.
1000M 달리기
아이들이 스스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참여하게 된 이 경주는 사실 결승점이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그래서 승리한 자도 패배한 자도 없는 마라톤이다. 굳이 경쟁자를 따지자면 스스로가 유일한 경쟁자인 "인생"이라는 고독한 마라톤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대학 진학”이라는 분명한 결승선이 있는 경주로 알고 있다. 결승선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다는 것인데,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가? 가장 큰 문제는 누가 정해주지도 않았는데, 스스로가 기준을 정해놓고 스스로를 패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대학은 300여개가 넘는다. 대학별로 해마다 1,000명씩 입학을 한다라고 가정하면, 매년 300,000명의 대학생이 새롭게 탄생하는 셈이다. 이 중에서 굳이 서열을 정해서 30위까지를 상위권 대학이라고 하고, “대학 진학”이 아닌 “상위권 대학 진학”이라는 또 다른 결승선을 만들어버리는 순간 30,000명을 제외한 270,000명은 이미 스스로가 패자인 것이다. 스스로를 패자로 만들어버린 아이들은, 아니 그것이 패배자라고 가스라이팅된 아이들은 1000M 달리기를 다시 한다. 반수를 하거나, 재수를 하거나, 심지어 삼수, 사수, N수를 해서, 그것도 아니면 편입을 해서라도 스스로에게는 끝나지 않은 1000M 달리기를 하고 또 한다.
그런데, 이 1000M 달리기는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종국에는 끝이 난다. 그리고, 스스로가 정한 기준이건 그것이 기준이라고 가스라이팅을 당했건 승자보다는 거의 대부분이 패자가 되는 경주이다. 아니, 실제로는 경주가 아닌데, 실제로는 패자가 아닌데, 그런 경주이고, 패자라고 여긴다. 세상에 태아나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성인으로써 공동체에 첫발을 내디는 시기를 스스로 패자로 시작하려 한다.
물론, 개인의 학문적 탐구 욕망을 채우고 새로운 기회와 사회적 성공의 확률을 높일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겨서 다시 수능을 치루거나 편입으로 상위권 대학으로 진학하려는 행위가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선(善)이고, 절대적 목표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패배자라는 주홍글씨가 되어서 진짜 경주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프레임에서 벗어날 노력조차 하지않고 최종적으로 패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체념하는 생각이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라고 여겨진다. 30,000명의 아이들에게도, 270,000 명의 아이들에게도 정말로 이야기 해 주고 싶다. 결코 승자도, 패자도 아니라고, 진짜 경주가 있다고 한들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고, 너희들의 잘못이 결코 아니라고. 그리고, 정말 수고 많았다고. 스스로를 충분히 대견하게 여겨도 된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님은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후배들에게 서울대 졸업장을 거머쥐었다고 축하인사를 전하면서 당장의 취업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것은 맞지만, 딱 거기까지라고 했다. 긴 인생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직장을 얻을 때에도, 70대에 할 일을 찾을 때에도 서울대 졸업장이 지금처럼 막강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판이라고 이야기했다. 42km,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1000M 앞서 달렸다고 마지막에도 금메달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또한, 1000M 지점에서 조금 뒤쳐졌다고 결승선에서 금메달을 따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정확히 정의할 수도 없는 그 금메달 자체가 절대적 가치, 유일한 목표가 되어서도 아니될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서울대라는 결승선에 닿기 위해서 기꺼이 장님 경주마가 되려 한다.
최재천 교수님은 공정(公正)과 공평(公平)은 다른 것이라 이야기하시면서, 공평에 양심을 더해야 비로소 공정이 된다고 하셨다. 사전적 정의에서도 공평은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고름”을 의미하지만, 공정은 “공평하며 올바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공평에 올바름이 더해져야 공정이 되는 것이다. 키 차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똑같은 높이의 눈높이 의자를 주는 것은 공평이지만, 키가 작은 아이에게 조금 더 높은 의자를 주는 것은 공정인 것이다. 하지만, 가스라이팅된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결승점 만이 중요한 경주마이어서 옆을 볼 수 없기에 기계적 평등인 공평만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작은 성과만이 위대한 것이라 여기거나, 아니면, 자신의 노력으로 일궈낸 작은 성과를 하찮게 여기며 그렇게 길들여진다. 공정을 위한 "고르지 않은 공평"은 "양보가 아니라 배려"다. 건강한 우리 공동체를 위한 최소한의 성의다.
세뇌받은 대학생, 갈 곳 잃은 경주마
가스라이팅의 가장 큰 폐해는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없애려 하는 점이다. 오늘의 대학생들에게 가장 큰 슬픔은 “자존감”이 없다는 것이다. 가장 사랑하고 따뜻하게 대해야 할 자신에게 너무 무지하며, 신뢰하지 못한다. 한 차례 작은 경주같지 않은 경주가 끝이 났다. 경주에서의 등수와는 상관없이 경기는 끝났다. 그럼에도 1등이 아님을 곱씹으며 무언가 크게 어긋났다 여기며 스스로를 공격한다. 아직 수많은 경주가 남았음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듯, 그리고 그것이 종국에는 경주가 아니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며 첫 번째 경주에서의 못남을 자책한다.
상위권 대학을 입학했건, 하위권 대학을 입학했건, 모든 대학생들은 한 때 자신의 전부였던 대학생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런데, 이 목표는 사실 자신이 세웠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기에 생각없이 그럴거라 자신의 목표로 여겼고, 그렇게 마냥 달렸을 뿐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대학교에서 학생들과 이야기 나누어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학생들에게 “고등학교 때와 비교해서 대학교에 와보니 뭐가 달라졌어?”라고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마다 적지않은 대학생들은 “과목을 스스로 선택해서 수강할 수 있는 것”, “매일 아침 일찍 등교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라고 하는 너무나도 지엽적인 답변만을 한다. 아이들에게는 대학교가 그냥 조금 달라진 고등학교 4학년, 5학년 이었던 셈이다. 최고 고등 교육 기관으로써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온데간데 없이 무엇을 해야할 지 몰라 방황하는 어린 조랑말에 지나지 않음이다. 심지어, “성적맞춰 왔어요”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나름의 거대한 학문적 지향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 일지도 모른다.
책임이 빠진 자유(自由)는 방종(放縱)이다.
많은 대학생이 대학교에 와서 느끼는 첫번째 감정은 해방감이다. 이 해방감은 충분히 이해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놓치는 지점도 있다. 바로 성인이 되었다라는 사실이다. 포유류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태어난다라고 한다. 이러한 불완전함은 부모들의 보살핌으로 극복되고 비로소 완전한 사회적 구성원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엄청난 교육열과 무엇인지 모를 성공에 대한 편향성으로 아이들을 아예 품속 주머니에 넣어버리고 밖으로 끄집에 내지 않는 보살핌으로 캥거루 새끼를 만들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의 대학생은 “성인 아이”가 적지않다. 해방감에서 여러 자유를 만끽하며 선택들을 하는데, 성인으로써 모든 행위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너무나 상식적인 부분을 망각하고 방종으로 빠지는 경우가 제법 있다. 나아가 “결정 장애”라고 해서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결정 자체를 못하는 경우도 제법이다. 자신의 삶의 경로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지점에서도 선택을 하지 못하고 부모를 찾는다. 부모가 시켜서 공부를 했고, 부모가 시켜서 대학을 진학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학위를 수여한 그 다음도 그것이 무엇이건 부모가 시켜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사실 이는 아이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가스라이팅된 아이들은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없다. 스스로의 선택을 믿지도 않지만, 스스로 선택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로를 없애고, 스스로를 지하 창고에 꼭꼭 숨기고 꺼내지 않았기에 그것을 갑자기 꺼내라고하면 무서워하는 것이 일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모두가 대학을 진학하는 상황에서 홀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리라. 그래서, 대학을 진학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춘다. 그래서, 국영수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도 충분히 타당하다. 왜냐하면, 대학 진학을 위해서 치루는 수학능력시험에서 점수를 획득하여야 대학을 진학할 수 있다고 여기기에 수능 시험에서의 국영수 과목의 점수 획득은 매우 중요할 것이니까. 이렇게 자의보단 타의에 의해서 대학을 진학한 아이들은, 함께 달려가는 삶이 아니라 끌려가는 삶이었기에 훨씬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맞이하는 자유를 마음대로 만끽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치, 정말 경주가 끝난 것처럼.
끌려가는 삶에서 책임감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설혹, 자신의 삶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의 선택이 없었기에 핑계와 변명만이 남는다. 또한, “엄마 때문이야”라는 소심한 책임 전가는 방향잃은 조랑말의 애처로움으로만 보여진다. 분명 아이들의 잘못이 아닌데,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잘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대학을 진학한 아이들은 이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생(未生)은 미생일 뿐이다. 그래서, 책임에도 연습이 필요해 보이는 이유다.
선택하지 못한 삶, 책임지지 않는 사회
여전히 고등학교를 다니는 듯한 우리의 대학생들은 대학교를 “그냥” 다닌다. 아침에 눈을 떠서 이유도 없이 그냥 불빛으로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관성으로 학교를 간다. 교양 필수, 전공 필수 등등. 심지어 과목 선택권도 없었던 고등학교 때처럼 그렇게, 자신이 선택했는지도 아리송한 수업을 듣고 중간과 기말 시험을 치룬다. 그리고, 성적을 잘받았건, 못받았건 그것으로 끝이다. 한 학기가 끝나면 모든 학습은 리셋이 되는 듯 하다. 마치, 매 학기 단기 암기력 테스트를 보는 듯 하다. 고등학교 때의 관성으로 성적만이 중요하다 여기고, 좋은 성적만을 받을 수 있으면 소위 “족보”타는 교수님의 과목이어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 교육에 대한 현실적 비판을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것 자체가 과욕인지는 오래다. 레포트는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복사 붙여넣기로, 4차 산업 인공 지능 시대에서 교양 필수가 되어버린 Python 과목은 속칭 “손코딩”으로 중간, 기말 시험을 치고 성적을 받는다. 코딩마저 단기 암기력 테스트를 하는 학교 현장이다.
학기 중에는 성적 만을 위한 단기 암기력을 효과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해서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2개월 여의 방학 기간 동안 암기한 지식은 리셋되어서 다음 학기를 맞이한다. 학문적 연속성, 선수 과목의 이해 등의 실질적인 문제 인식은 기대하기 어렵다. 심지어 남학생의 경우는 군복무를 마친 후에 언제나 하는 말이 있다. “휴학전 배운 거 다 까먹었습니다”라고 표현한다. 까먹었다는 것은 결국 암기를 했다라는 것에 대한 방증(傍證)이다. 그리고, 복학 후 그 아이들은 다시 암기하기 시작한다. 마치 암기를 해서 인공 지능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이. 그리고, 지금 인공지능이랑 경쟁하려고 하는 상황을 애써 외면하려는듯이.
망망대해에서 홀로 돛단배 위에 있는듯한 아이들은 그게 무엇이건 열심히만 하면 될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너무 넓은 바다에서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젊은 열정 하나로 열심히만 노력한다면 육지를 만나지 못하고 결국 힘겨운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대학을 다닌다. 최종 목적지는 대학 졸업장 일테니. 정말 아이러니한 건 이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학위를 수여한 이후에 취업을 하기 위해서 다시 학원을 간다. 박사 학위의 교수님이 설명한 내용이 부족(?)해서 학사 학위의 강사에게 수업을 다시 듣기 위해서 학원을 간다. 학사 학위, 졸업장이 이미 있는데, 취업하려 학원을 다시 간다.
그런데... 이런 노력에 비해 기업은 너무 쉽게 퉁 쳐내버린다. 학교가 아이들에게 문서로 줄 수 있는 것은 학사학위 증명서, 졸업 증명서, 성적 증명서, 이 3가지 뿐이다. 엄청난 세월과 노력의 결과인 이 3가지를 "이젠 그닥 중요하지 않아"라면서 "블라인드 채용"을 시대적 흐름이라 말한다. 북미 빅테크 기업들은 대학에서의 전공, 학사학위 소지 여부를 중요 요소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팔란티어'라는 AI 대기업은 대학가지말고 자신의 회사에 입사하라고 이야기한다. 자신들이 교육시켜준다고.. 국내 대기업 또한 예전과 같은 대규모 공채보다는 니즈(Needs)에 따른 수시 채용 형태로 점진적 변화를 하고 있고, "중고 신입"이라는 이름으로 경력직을 선호하는 현상이 점차 뚜렷해 보이는 듯 하다.
단순 지식 전달 방식의 현 대학에서의 교육 시스템이 AI를 등에 업고 아주 강력히 도전받고 있는 형세이다. 또한, 기업은 사회 초년생의 직무 교육의 책무를 방기(放棄)하듯 4차 산업 시대 생존을 위해 경력자 선호가 두드러진다. 산학(産學)간의 격차는 심화되는데, 책임지려는 쪽은 보이지 않는 듯 하다. 이 속에서 전세계적으로 이념적 편향도 심해지며 글로벌 상황도 혼란스러운 형세는 가중되는 듯 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엎친데 덮친 격이고, 불난 집에 기름을 제대로 붇고 있는 형국이다.
아이들이 위기다.
생각하지 않고, 준비되지 않은 아이들이 고등학교 4학년을 다니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그 방황은 끝나지 않는다. 이미 캥커루 새끼인데, 어미도 이제는 답을 해 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아이들이 정말 위기다. 질문할 곳도 없고,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질문을, 어딘지는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해야 한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나의 인생에서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성인"이 되어 버렸다. 인공 지능 시대, 방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야말로 망망대해 위 연약한 하나의 돛단배일 뿐이다.
그.래.서...
대학을 다니지 말아야 한다. 대학을 그냥 다니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대학을 이용해 먹어야 한다. 수동적으로 그냥 대학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학을 이용을 해 먹어야 한다. 분명한 나의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하는 삶으로 고등학교 4학년이 아닌 대학교 1학년을 시작해야 한다. 더 이상의 가스라이팅에서는 벗어나서 미숙한 메타인지를 훈련하고, 모든 것이 정답이 아닌 상황에서 나에게 맞는 정답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훈련해야 한다. 수많은 실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처음 해 보는 것이기에 실수투성이 일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아직, 학생이다. 아직은 온실 속 비닐 하우스 안이다. 따뜻한 흙 위에, 부드러운 모래 위에 있다. 넘어져도 다치지 않으니 계속 기존의 정답을 비판하며, 부딪히고 넘어져야 한다.
망망대해 속에서 자그마한 빛, 등대를 찾아야 한다. 나의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으려면 희미한 불빛 하나 의지해서 작은 돛단배로 저어나가야 한다.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며, 실수를 거름삼아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면 된다. 마라톤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조금씩 뛰면 된다. 힘들면 천천히 걸어가도 된다. 등대가 있는 쪽으로, 방향이 중요하다.
학문을 공부하지 말고,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라. 인공지능을 이기려 하지 말고, 인공지능이랑 함께 하라. 24시간 엄청 똑똑한 교수님이 바로 옆에 있다. 유교에서의 겸양(謙讓)은 잠시 치워두고, 철저히 이용해 먹어라. 아예 비서 부리듯 해야 한다. 막 대하라. 괜찮다. 기계일 뿐이다. 인공 지능은 너희들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질문을 마구마구 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이 되었건 씹어먹어야 한다. 전공이라는 것은 허울일 뿐이다. 박학다식(博學多識)이 디폴트가 된 시대다. 심지어 깊이까지도 갖출 수 있다. 모든 것이 활짝 열린 더할나위없이 풍요로운 시대다.
질문이 중요하다. 질문을 질문하라. 질문을 위해 메타인지가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질문하라. 그리고,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식 위에 지혜다. 지식이라는 건강한 토양이 있어야 지혜라는 나무가 무럭무럭 자란다. 모르는 것이 많은 척박한 토양을, 아는 것이 많은 비옥한 토양으로 만들고 너희들의 건강한 작은 나무를 심어서 정성을 다해서 돌보아야 한다. 그러면, 드디어 '등대'가 보일 것이다. 거기가 정답이다.
위기(危機)는 위험(危險)한 기회(機會)다. 망망대해는 너희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고, 너희가 찾은 그 등대는 사실 너희를 훈련시키는 코치일 뿐이다. 그 등대가 지금의 너희에게는 도착해야 할 곳이겠지만, 그 곳에 도착하면 결국 그 등대를 등지고 진짜 망망대해로 떠나가야 한다. 그 때부터가 진짜 너희들만의 경주다. 거기가 진짜 험난하다. 그래서, 등대를 찾고 그 등대까지 가는 동안 반드시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훈련해야 한다. 공평이 아닌 공정의 따뜻함으로 거북이처럼 한발씩 걸음을 옮기면 된다.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이여~~
이 땅의 청년들이여!
미안하고, 고맙다.
어제보다 오늘, 한발씩만 내딛기를 온힘을 다해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