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출판 프로젝트를 시작한 게 2년이 지난 현재 두 번째 번역서를 준비 중이다.
책 이름은 '출근했더니 스크럼 마스터가 된 건에 관하여'라는 라이트 노벨 같은 제목의 만화 반, 설명 반의 스크럼(scrum) 입문서다.
현재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 중인데 다행스럽게도 달성률 100%를 넘겨 한 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크라우드 펀딩: https://tum.bg/x0ZhwI
크라우드 펀딩 중인 '출근했더니 스크럼 마스터가 된 건에 관하여'
책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런 거다.
나는 왜 내 책날개에 다른 출판사의 책을 홍보하는가?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건 현재 준비 중인 책의 뒷 표지 날개인데 우측 하단에 책 두 권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두 책의 출판사가 각각 다르다. (음?)
책날개에 다른 출판사의 도서를 소개한 모습
보통은 책날개에 저자나 역자의 약력을 싣거나 자사의 도서를 홍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은 내가 만든 1인 프로젝트 ZZOM의 '처음 배우는 그래픽 레코딩' 외에도 천그루숲 출판사에서 나온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소개하고 있다.
내용면에서는 연결 선상에서 이어서 보면 좋을 책인 건 분명한데 왜 다른 출판사의 책을 소개했을까?
소개한 도서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https://bit.ly/3eJoz4P
책은 어떻게 만들었지만 확신이 필요했다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작년에 만든 '처음 배우는 그래픽 레코딩'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나는 'Graphic Recording'이란 분야에 꽂혀서 이걸 한국에 어떻게든 소개하고 나도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해외에서 관련 입문서를 찾았고 번역서를 내기 위해 1인 출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솔직히 나에게는 책 만드는 과정이 아주 어렵진 않았다. 내가 하던 IT 프로젝트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납기나,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작업 범위나, 조직 내에서의 정치적인 트러블이나, 기술적인 장애나,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 오류와 같은 돌발 변수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출판 프로젝트는 오히려 역할 분담이 확실했고, 납기도 합리적이었으며,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이 최소화되고 시공간의 차이도 제약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번역서는 원서의 품질이 일정 수준 보장이 되는 좋은 재료이기 때문에 커스터마이징(현지화)에만 집중하면 되었고, 출판 편집 툴은 개발 툴 다루듯 익히면 되었다. 글 작성 자체도 매뉴얼이나 산출물을 작성하듯 문서를 작성하고 오류가 없도록 교정하면 되었다. 신텍스 에러를 찾듯이 교정, 교열을 했고, 컴파일 에러를 찾고 소스코드 정적 분석을 하듯이 맞춤법 검사기를 돌릴 수 있었다. 3자 테스트처럼 베타 리더를 모시고 코드 리뷰를 할 수도 있었다. 특히 EPUB 전자책은 정적 웹 사이트를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전문가 리뷰'였다.
그래픽 레코딩 기법으로 강연 내용을 기록한 예시 처음 직접 제작한 번역서 '처음 배우는 그래픽 레코딩': https://bit.ly/3yZMq75
개발로 치자면 로컬 PC에선 잘 돌아가는데 운영 서버에서도 돌아갈지 확신이 없었다
개발자는 기본적으로 가상의 환경에서 무에서 유를 만드는 데 익숙하다.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뜯어고치고 테스트하고 다큐멘테이션까지 풀 사이클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도저히 혼자서는 힘든 게 실 세계, 진짜 운영 환경에 배치(deploy)할 때는 해당 환경을 겪어본 경험자의 도움과 인프라를 갖춘 운영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실제 필드에 제품을 배포해본 사람, 실제 고객과 인터랙션 해본 사람, 제품을 시장에 내놓고 그 반응을 지켜본 사람의 의견이 목말랐다.
그래서 도울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았다. 당시에 잘 보던 책을 연달아 출간한 곳이 '천그루숲'이었는데 대표님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흔쾌히 봐주신다고 했다. 이전에 'IT트렌드를 읽다', '마케팅 차별화의 법칙'과 '생각정리기획력' 출간 기념회 때 몇 번 가볍게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이렇게 염치없는 부탁을 들어주실 줄이야. 어쨌거나 모처럼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당장에 원고를 들고 찾아뵈었더랬다.
천그루숲 출판기획자 백지수님(왼쪽)과 백광옥 대표님(가운데)의 원포인트 레슨을 받았다
사실 전체적인 디자인 리뷰는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모모책방 강진영 대표님의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 지면 위에서 개체 간의 정렬이나 폰트 크기, 행간 간격이 주는 유관 정보와의 관계 등 적지 않은 팁을 알려주시고 독립 서점 점주 입장에서 독립 서점 독자가 좋아할 만한 팁도 얻을 수 있었다.
천그루숲 백대표님은 당시 목차의 위치나 ISBN 바코드 크기, 면지 활용법 등 다양한 조언을 주셨는데 무엇보다 큰 성과는 내가 찾아뵙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업계의 '선배'가 생겼다는 점이다. 개발로 치자면 각종 개발 이슈나 트러블 슈팅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어깨너머로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절정 고수 개발자'를 만나게 되었다는 기쁨에 비할 수 있겠다.
당시에 멘토링 받으면서 메모한 내용 역시 멘토링 해주셨던 내용 중 일부
무엇보다 나는 IT 개발로 치자면 운영 서버(인쇄기)가 없다. 가상화된 배포 단위로 PDF까지 출력할 수 있지만 진짜 종이에 찍을 인프라가 없으니 인수 테스트(고객 구매)를 통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인디고 인쇄라는 물성과 색감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제작될 프로덕트(책)는 옵셋 인쇄 방식이다. 결국 인디고 인쇄는 프로토타입(가제본)에 불과할 뿐 실제 디플로이(출간)할 수 있는 수준을 보장하긴 힘들었다.
그런데 백대표님이 내가 가장 취약했던 인프라 부분인 '인쇄'에 관한 불확실성을 단 번에 해결해주셨다. 바로 천그루숲이 이용하는 인쇄소, 예림인쇄를 소개 주신 것이다.
예림 인쇄에 인쇄 감리로 방문하여 현장을 살펴볼 수 있었다 개발 프로젝트를 할 때는 감리를 받아만 봤지 감리를 해본 적은 없었다 파주 다녀오느라 그 유명한 '합정역 5번 출구'도 가보고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나름의 성의를 표시하고 싶었다
그렇게 많은 조언과 인맥의 도움까지 얻은 나는 덕분에 첫 책을 준비하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뭔가 감사 인사는 하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찾았다.
책날개에 도움 주신 분들의 책 소개를 하자
그렇다고 아주 무관한 책을 소개할 순 없고 그 책의 맥락과 어울리는 책이어야 했다. 그래서 찾은 책은 천그루숲의 '생각정리 스피치'로 생각을 정리하고 발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었다. '처음 배우는 그래픽 레코딩'은 반대로 다른 사람의 발표 내용을 그림으로 정리하는 기법이니 각종 강연, 발표 현장에서 한 사람은 발표자의 입장에서 '생각정리 스피치'로 발표를 하고, 다른 사람은 청중의 입장에서 '처음 배우는 그래픽 레코딩'으로 그 내용을 기록할 수 있다는 조합을 생각해낸 것이다.
생각정리 스피치: https://bit.ly/3SyloKZ
한편 또 유관된 책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이전에 '로드북' 출판사의 번역 의뢰로 작업했던 '비즈니스 프레임워크 도감'이 괜찮아 보였다. 로드북 출판사는 1인 출판을 하기 전까지 번역 의뢰를 가장 많이 해준 출판사고 '비즈니스 프레임워크 도감'은 '처음 배우는 그래픽 레코딩'에서 도식을 정리할 때 쓰는 기법을 더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딥 다이브 하기에 좋은 책이라 생각했다.
비즈니스 프레임워크 도감: https://bit.ly/3D1JU1e
앞으로 만들 책과 로드북에서 번역한 책, 천그루숲의 함께 보면 좋을 책을 소개한 책날개
그렇게 완성한 게 '처음 배우는 그래픽 레코딩'
그렇게 시작한 책날개 활용 방법이 다음 책으로 이어지다
그렇게 만든 책은 1,600부가 나갔으니 적어도 책에 관심 있는, 책을 읽고 있는, 책을 살만한 사람 1,600명에게는 전달된 셈이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는 아니지만 나니까 할 수 있는 (책날개에 소개할만한 기 출판된 도서가 없는), 이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조금이나마 감사를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을 실험하게 되었다. 실제 전환율이 어떤지는 측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누추한 지면에 귀한 책을 모시게 되니 괜히 뿌듯하기도 하고 다른 책으로 이어지는 끈을 하나 놓으면서 독자에게 또 다른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아 들뜨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책에도 이렇게 들어가게 된 것이다. 내가 만든 책 보다 위에 먼저 놓은 건 제한된 지면 안에 감사 표시를 최대한 끌어낸 최적화의 결과다.
왼쪽 하단에 소개한 함께 보면 좋은 책 이번에 소개한 책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고 있습니다'는 '기획자'라는 역할이 '출근했더니 스크럼 마스터가 된 건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프로덕트 오너'와 맥이 닿는 역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획을 하다 보면 개발자와 협업할 일이 있고, 개발자는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스크럼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출근했더니 스크럼 마스터가 된 건에 관하여'에서 설명하고, 반대로 '프로덕트 오너'가 되고 싶거나 기획 업무를 더 이해하고 싶을 때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고 있습니다'를 보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함께 소개한 책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https://bit.ly/3N4XOoa
앞으로도 계속 도움받은 출판사의 책을 소개할 수 있을까?
책날개 공간은 제한되어 있다. 반면 내가 도움받은 곳은 수도 없이 많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 은혜를 다 갚으려면 얼마나 더 책을 내야 할까? 그리고 그 책과 유관된 주제를 다루려면 얼마나 많은 분야로 확장해야 할까?
1년에 1권을 겨우 내는 1인 출판 프로젝트라 만들어낼 수 있는 책날개 공간은 제한되어 있다. 다루는 주제는 내가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다른 출판사가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책을 내고 있으니 그중에 하나쯤은 내가 내는 책과 맞닿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관 주제에 관한 확장 포인트는 큰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책날개 공간이 문제가 되는데 사실 이 글을 쓰면서 그 답을 찾았다.
꼭 책날개에 소개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다. 이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된 건 꼭 책날개가 아니라도 다른 출판사의 책을 소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처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책을 만드는 것 말고도 책을 홍보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는 이야기고 브런치,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더 많은 채널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기도 하겠다.
결국 내가 은혜를 갚는 길은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의 스펙트럼을 넓혀 더 많은 공간, 더 많은 접점을 만들면서, 좋은 콘텐츠를 공급하는 방법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거기에 다른 책을 소개하면 그게 곧 내가 받은 도움을 조금이나마 되돌려 선순환을 만들 수 있는 고리가 될 것이다.
1인 출판 프로젝트로 혼자 책을 만들지만 사실은 더 많은 사람의 도움이 깃든, 마치 제다이의 포스 고스트 같은 존재가 지켜주는 느낌으로 책을 만들 것이다. 내가 보니 좋았던 책을 다른 사람도 보면 좋을 거란 생각으로 1인 출판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이젠 내가 함께 보니 좋았던 책을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도록 테크 트리를 만들고, 큐레이팅을 하는 부분까지 기획 범위를 넓혀봐야겠다.
더디겠지만 지금까지 한 것처럼 한발 씩 나가보자.
세상의 모든 지식 창작자와 유통자와 소비자에게
포스가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