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번역할 거면 기계 번역을 하지 뭐 하러 번역자가 필요한가
그간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면서 축적된 나만의 노하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번역한 도서로는 『출근했더니 스크럼 마스터가 된 건에 관하여』, 『처음 배우는 그래픽 레코딩』, 『사고법 도감』, 『딥러닝을 위한 수학』, 『비즈니스 프레임워크 도감』, 『인공지능을 위한 수학』, 『1억배 빠른 양자 컴퓨터가 온다』, 『스프링 철저 입문』, 『클라우드 인프라와 API의 구조』, 『TCP/IP 쉽게, 더 쉽게』, 『네트워크 엔지니어의 교과서』, 『XCODE로 배우는 코코아 프로그래밍』, 『OBJECTIVE C』등이 있습니다.
• 번역한 도서 목록: https://codelabor.github.io/translating-developer/
일부 번역서가 기계 번역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는 텍스트를 텍스트로 번역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제가 번역하는 책은 옆 사람이 읽어주는 느낌이 난다는 피드백이 많은데 이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번역하기 때문입니다.
1 외국어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고 (Text to Speech)
2 그 소리를 귀로 들은 다음
3 머리에서 이미지를 그리고 (Speech to Image)
4 그 이미지를 한국어로 소리 내어 말하고 (Image to Speech)
5 그 소리를 글로 옮겨 씁니다. (Speech to Text)
6 이 과정을 단락 단위로 1차 번역한 후, 챕터 단위로 2차 번역합니다.
7 관련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영문 용어 대조하여 병행 표기합니다.
8 한국 내 온라인 문서를 검색하여 현장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교체합니다.
9 현지화 내용을 추가하고 베타 리더의 피드백을 반영합니다.
10 전체를 살펴보며 3차 번역(교정, 교열, 윤문) 합니다.
요즘에는 소리 내어 읽는 게 힘이 들어서 파파고의 TTS(Text to Speech) 기능을 활용하는데요. 성우가 대신 읽어주는 소리는 좋은데 번역된 텍스트는 이해에는 도움 되나 상품에는 쓰기에 곤란한 수준이라 음성의 도움만 받고 있습니다. 실제 작업을 어떻게 하는지 영상으로 확인해 보시죠. (유튜브 들어가신 김에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합니다 ㅜㅜ)
• 옆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번역하는 방법: https://youtu.be/rym1SFxTKgQ
소리와 이미지를 거치는 번역 공정에선 호흡이 긴 문장은 짧아지고, 어려운 표현은 쉽게 순화됩니다. 직역한 것 같은 어색함이 사라지고 다른 사전적 의미로 오역되지 않습니다. 무의미하거나 중복된 내용이 정리되는 효과도 있죠. 설명이 필요한 단어는 각주로 풀어쓰고 원서의 지면 관계상 미처 담지 못한 것은 번역서에 부록을 추가해서라도 보충하려 합니다.
요컨대 문장을 1:1로 매칭시키고 길이마저 비슷하게 유지해야 하는 공간이 한정된 매뉴얼이나 소프트웨어 국제화 같은 번역이 아니라면 '번역'이 아니라 '통역'한 후 글로 옮기는 게 사람이 읽기 편한 번역문이 됩니다.
사실 문제는 이 방법이 품이 많이 들어간다는 점인데요. 번역비가 최저 수준이면 기계 번역 돌린 후에 윤문하는 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종종 번역 결과 검수하시는 분도 기계 번역 돌려서 내용을 대조하며 번역이 이상하다고 하시던데 그런 클라이언트라면 기계 번역 초벌 후에 윤문해서 드려도 됩니다.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번역문은 '독자'를 위한 것이지 '출판 관계자'를 위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출판 관계자의 이름은 책 내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인쇄되지만 번역자의 이름은 책 표지와 책 등처럼 잘 보이는 데 찍힙니다. 값싼 번역비로 내 이름을 팔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값싼 번역비는 기계 번역에게 양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