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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작가 Sep 06. 2018

중년 남매의 스컬피 놀이-박 여사의 핸드메이드 내공

늙은 남매 이러고 논다!


늙은 남매는 이러고 논다!


어느 날 남동생이 달뜬 목소리로 전화했다. 얘긴 즉슨, 자기가 하는 수업을 들으러 오라는 거였다. 아주 재미난 재료가 있으니 인형을 만들어보라는 동생의 말에 내 관절도 생각지 못한 채 방방 뛰고 말았다. 이런, 우리 나이가 몇이던가. 


우린 오 남매다. 어린 시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 언니는 기타를 메고 성당, 절, 교회를 섭렵하며 온갖 모임에 나갔으며 차분하고 조용한 그 아래 언니는 다소곳하게 방구석에 들어앉아 머리를 빗곤 했다. 짝사랑하던 동네 대학생 오빠에게 일기장에 연애편지를 쓰고 있거나 집 안에 숨겨둔 포도주를 할짝거리던 묘한 스타일. 내 바로 위 오빠는 눈이 왕방울만 한 동네 여자애한테 반해 영혼을 남김없이 태우며 꽁무니를 따라다니느라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못난이 인형처럼 우리는 뾰루퉁하고 헤벌쭉하며 걸핏하면 울어제꼈다.


따라서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 막내들은 그저 흙이며 곤충이며 집히는 대로 주무르고 집 근처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를 가지고 소꿉놀이를 했다. 사는 곳이 워낙 시골 과수원이라 필사적으로 놀거리를 창작해내던 시절이었다. 한여름에 엄마는 마당 샘가에 붉은 고무 대야(통)를 놓고 물을 받아 따끈하게 데워놓곤 하셨는데 종일 흙바닥을 뒹굴며 때가 꼬질꼬질해진 동생과 나는 천연 태양에너지로 데운 고무 대야 스파를 더없이 즐겼더랬다. 


그 귀엽던 꼬마둥이 남매는 이제 눈이 침침하고 탈모에 치를 떠는 중년이 되었다. 깜박 졸았더니 어른이 되어있는 것처럼 이따금 우리의 나이가 황망하다. 나는 아직 동생과 덜 놀았으며 소꿉놀이도 더하고 싶은데 말이다. 아무리 놀아도 놀거리가 널렸던 그때, 몸이 부서져라 뛰어 댕기던 하룻강아지 같던 그때.


나이테기행/ 안승희/길찾기


40여 년 전 천둥벌거숭이로 과수원을 헤집고 다녔던 어린 나와 동생을 소환해 잠시 놀아보기로 했다. 40대 중후반의 남매가 손장난을 하며 인형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뭉쳤다. 늙은 남매는 이러고 논다! 




스컬피로 인형 만들기


동생은 대학에서 조소를 가르친다. 어릴 때부터 손으로 뚝딱뚝딱 뭐든 잘 만들었는데 학교에 들어가서는 공책이며 교과서며 닥치는 대로 온갖 그림을 그려댔다. 난 그걸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가끔 동생의 기괴하고 엉뚱한 그림들에 이야기를 지어내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 놈은 어설픈 조각가가 되고 한 놈은 더 어설픈 동화작가가 되고 말았다. 분명, 놀이는 우리에게 길을 터주었다.


동생은 방학 동안 미술대학원생 특강 프로그램에 '스컬피로 만들기'를 구성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하루 동안 나에게 수업을 듣게 했다. 학생들은 너그러이 나를 받아주었고 덕분에 동생의 스컬피 수업에 1일 학생으로 앉게 된 것이다.

"제발 만들고 싶은 거 만드세요. 주제 달라고 하지 마시고요. 여러분들이 만들고 싶은 그것! 그것을 마음껏 자유롭게!" 라며 수업을 시작한 동생은 제법 멋진 구석이 있었다. 


스컬피(sculpey)는 폴리머클레이의 대표 브랜드로 프라모델이나 피겨(figure) 들을 제작하는 조형 재료로 많이 쓰인다. 지점토랑 비슷한데 실온에 그대로 둬도 굳지 않아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덧붙이고 떼며 모양을 만들 수 있다. 만든 후에는 물에 끓이거나 오븐에 구워 낸다. 


기본 재료는 펌 그레이 슈퍼 스컬피와 공예용 철사, 알루미늄 포일. 


보통 시중에서 살 수 있는 스컬피는 오리지널(흰색), 슈퍼 스컬피(살색), 펌 그레이 스컬피(회색)가 있다. 가격대가 2만 원 언저리로 만만치 않다. 그 가운데 펌 그레이 스컬피를 선택했다. 처음엔 제법 딱딱하니 손으로 계속 주물러 온기를 주거나 스컬피 전용 유화제를 한 두 방울 섞어 조물조물 말랑하게 만들어 둔다. 단단해서 손이 아프지만 하다 보면 모양을 내기가 수월하고 변형이나 파손에도 강하며 디테일을 표현하기가 좋다는 장점이 있다. 



공예용 철사로 뼈대를 만든다. 뼈대가 없으면 형태를 안정적으로 잡기 어렵다. 



내가 만들고 싶은 인형은 <월레스와 그로밋>. 동생과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다. 동생과 나는 곰돌이 푸에 나오는 피그렛과 스펀지밥도 무척 좋아한다. 40대 중후반에 들어선 늙은 남매가 시시덕거리며 캐릭터 사랑에 열을 올리다니. 


영화 촬영에 쓰인 월레스와 그로밋 인형


찰흙으로 빚어진 도구들을 조금씩 움직이고 촬영한 스톱 모션 클레이 애니메이션. 런던에 사는 어리바리한 발명가 겸 사업가 월레스와 그런 월레스를 돌보고 뒤치다꺼리하는 반려견 그로밋이 주인공이다. <화려한 외출>, <전자 바지 대소동>, <양털 도둑>.. 들이 있고 2005년 극장에서 개봉된 <거대 토끼의 저주>는 250여 명이 5년 동안 만들었다. 얼마 전 아드만 스튜디오의 국내 전시가 있었다. 



뼈대에 포일을 감싼다. 스컬피가 잘 붙고 재료를 아낄 수 있기도 하다. 다만 너무 많이 포일을 감싸지 않도록 한다. 나중에 포일이 삐져나올 수도 있다.


시들시들 갱년기 중년의 누나를 칭찬해주고 토닥여주며 가르쳐주는 동생.


얇게 편 스컬피를 필요에 따라 조각내서 붙이고 있다. 몸통을 만드는 방법은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찰흙으로 만들던 과정과 별로 다르지 않다. 동생이 시범을 보이면 누나가 따라 하는 중. 수업 중 여기저기서 히죽히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도 대체로 좋아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있었다.  



형태를 잡아가며 살을 붙이고 날렵한 도구들을 이용해 디테일을 손보고 있다. 얼굴이 얼추 만들어지자 삐죽삐죽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생과 나는 월레스가 달에서 잘라먹던 치즈 얘기를 하며 군침을 흘렸다.



대략 만들다 보니 세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비율이 조금 어긋났지만 한눈에 월레스라고 알아볼 정도로 만들었으니 만족하련다. 


남은 스컬피로 심심풀이 삼아 만든 반지들. 반지 프레임은 자수용 반제품.


 월레스가 익어간다. 오, 이런!


완성된 스컬피는 오븐에 굽는다. 보통 130도로 15분 정도 굽는데 크기를 고려해서 온도와 시간을 조절한다. 집에 있는 오븐 최저 온도가 160도라 할 수 없이 160도에서 13분 동안 구웠다. 굽는 동안 탈 수도 있어서 오븐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았다. 


스컬피는 pvc(폴리염화비닐) 기반의 점토라 높은 온도에서 일부 성분이 기화되어 나오는데 그 성분들이 오븐 안쪽에 스며든다. 따라서 건강을 생각해 반드시 스컬피용 오븐을 따로 마련한다. 오븐이 없다면 끓는 물에 삶아도 된다. 단, 냄비는 조리용과 구분해 쓴다.

 

 

굽는 과정까지 마친 월레스. 세라믹처럼 표면이 매끄럽고 단단하다. 전문가들은 표면을 사포로 문지르거나 드릴로 갈아 완성도를 높이기도 하는데 나는 왕초보이고 울퉁불퉁 못생긴 느낌 그대로가 자연스럽기도 해서 그대로 두었다. 



무사히 구워진 월레스를 들고 친구의 작업실로 찾아갔다. 그녀는 애니메이션 작가 박진숙. 그녀와 나는 '투박'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만화 에세이를 작업해 연재하고 있다(박 여사의 인생 내공). 그녀의 도움을 받아가며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 중. 두세 번 덧칠해가며 색을 입힌다. 친구는 옆에서 스컬피 반지를 색칠하고 있다. 


친구가 마지막 손길을 더해주고 있다. 입체감이 살아나는 중.
투박의 콜라보 스컬피 반지. 쾌변의 욕구를 일으키는 무지개똥 반지가 귀엽다.

 

친구가 색칠해 준 무지개 똥 반지와 장미 반지. 아크릴 물감으로 칠하고 바니시로 마감을 했다. 이렇게 스컬피로 간단하게 액세서리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녀가 전해준 알록달록한 예쁨을 손가락에 얹으니 커피 맛도 상승. 


그로밋 표정이 살아있는듯해서 공연히 웃음이 난다. 혹시 날 째려보고 있는 거니?


같은 방법으로 완성한 그로밋. 사실, 나는 그로밋이 좋아 이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다. 꿈에 그리던 강아지 그로밋. 그로밋은 침착하며 영리하게 문제를 척척 해결하고 악한 것에 당당하게 맞선다. 무엇보다 언제나 월레스 곁을 지키는 속 깊은 강아지. 누가 봐도 월레스의 보호자는 그로밋이 아닌가.


채색 후 반광 바니시를 두번 발라 마무리했다.


완성된 월레스와 그로밋을 보고 있자니 마치 우리 남매를 보고 있는듯하다. 3년 먼저 태어나 어쩌다 누나가 되었지만 실은 동생을 보호해주지도 못했으며 동생을 위해 세상과 싸워준 기억도 없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동생은 안면 40% 정도에 오타모반(검푸른 점)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로 인해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동생은 긴 세월 아픈 마음을 지니고 살았다. 나는 동생의 검푸른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동생과 다른 내 얼굴이 미안했고, 장대비처럼 할퀴듯 내리치는 세상의 시선들을 한 줄기도 막아주지도 못한 채 그렇게 세월이 흘러버리고 말았다.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라던 윤동주의 시. 동생의 아픔을 안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없다. 


성인이 되어 10여 차례 고통스러운 치료 끝에 지금은 더없이 맑은 얼굴이 되었다. 그런 동생이 얼마 전 나에게 자분자분 얘기했다. 작업을 하며 고통을 견뎌냈노라고. 긴 세월 자기 안에 살고 있던 검은 개(우울)가 가끔 찾아왔지만 이제 떠나보냈노라고. 동생에게 켜켜이 쌓인 내 마음의 빚도 떠나보낼 수 있을까.


검푸른 점은 동생을 조각하는 사람으로 끌어당겼고 지금은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가게 한다. 


동생(박찬걸)이 만든 스컬피 조형물. 
Silce Image David/ 박찬걸


우리 남매는 참말로 오랜만에 소꿉놀이하듯 스컬피로 장난감을 만들었다. 짓궂게 툭툭 치고 사는 얘기 시시콜콜 나누고 방정맞고 실없는 소리 하며 말이다. 40여 년 전 과수원 외딴집에서 막둥이 둘이 흙장난했던 순간이 선물처럼 우리에게 잠시 찾아왔다. 


우리는 희끗한 머리의 중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철없이 놀고 싶은 모양이다. 동생에게 그로밋같이 능력 있은 보호자 누나가 되어주진 못하지만 그저 가끔 만나 아옹다옹하는 친구 같은 누나는 되어줄 수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동생은
이미 나보다 크며 나보다 깊고
나보다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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