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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May 21. 2024

이 회차를 읽지 마세요

2024_이야챌린지_033_이주리

임시 표지

"부끄러우니까요. 또 못 올리고 삭제했어요."

"그러면 평생 못할 텐데, 괜찮으세요?"

"더 좋아지면, 그래서 좀 용기가 나면 그때 도전할 거예요. 일단 글 자체도 너무 엉망이고…"


오늘도 핑계에 방문한 주리는 대화식 혼잣말을 끝냈다.

다른 사람들은 이세계로 가는 글로 승승장구하는데, 자신만 외딴곳을 향해 헤매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후우- 이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쓰겠다."


스스로를 다그치고 타이르는 그녀.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다.

도저히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만 한 이때.

또 진입하려는 속을 다잡은 주리의 고개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래, 25일."


달력을 확인한 눈빛이 비장하게 변했다.


"25일 동안 빼지 않고 하루 한 편씩 완성해 보는 거야."


내일이면 12월.

디데이 크리스마스.

11월의 끝자락에 오른 주리는 결심했다.

단 한 번도 케이크에 촛불 붙여본 적 없는 날.

고귀한 탄생을 축복하며 꼭 자신의 성공도 축하하기로.

다음날 아침.

다짐을 지켜내기로 굳게 마음먹은 그녀가 새하얀 화면을 응시했다.

일부러 폰도 침대에 놓고 온 참.

어제와 같은 시선으로 날짜를 본 그녀의 손이 마땅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1일 차. 인후는 죽었다. 그것을 알았을 때, 허망하기보다는 속이 들끓는 것이 먼저였다. 자신의 죽음은 믿었던 도끼에 찍힌 발등이니 말이다. 막 시간을 거슬러 숨을 뿜어낸 인후의 얼굴이 파삭 구겨졌다. 방금 전, 피를 토하던 자신이 떠오른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지 멀쩡. 꿈이라도 꾼 걸까? 그러나 그렇게 넘기기에는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분노는 여전했다. 이 감정이 결코 거짓이 아닌 것도, 그리고 잊히지 않는 순간 속 보여준 그들의 조소도 머릿속을 거세게 헤집었다. 빠득. 처음 독에 당했을 땐 의문이었다. 너희들이 왜. 당연한 물음이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비웃음과 조롱. 그리고 그 사이에 껴든 어떤 진실. 피를 토하는 중에도, 억울하고 분해서 기함이 나올 움직임을 보여서 놀랐던 그들을 어느 정도 궁지에 모는 것을 성공했지만 그게 다였다. 순간의 방심이어도 그들과 자신은 급이 달랐다. 말 그대로 말이다. 고작 A급 헌터에 불과한 자신이 S급의 길드원들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상태가 멀쩡했어도 불가능. 그것이 그를 더욱 사무치게 만들었다. 비집고 나오는 욕설을 삼킨 인후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자취방. 20대에 처음으로 얻은 독방에 우두커니 서있는 자신. 톡. 방치된 폰을 주워 두드리자 시간이 나왔다. 2034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진짜 연도를 확인한 인후는 고개를 숙였다. 무색하다. 하지만 이만큼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기회가 또 있을까. 34살, 천명길드 소속, A급 헌터, 우인후. 자신의 마지막 스펙을 읊던 그가 떨군 얼굴을 들었다. 어느새 천장에 닿을 듯 허리까지 쫙 펼친 그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다. 좀 전까지 온몸을 뒤덮었던 한이 가시고, 급속도로 냉정해진 뇌는 필요한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24살로 돌아온 자신. 그리고 이가 갈리지만 10년간 몸 담근 길드로부터 얻었던 미래의 모든 정보가, 그것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정리된 것들이 모두 머릿속에 있었다. 차갑게 식은 눈으로 몸을 돌린 그는 결정했다. 만년 A급이어도 자신을 내치지 않고 품어준 천명에 뼈를 묻을 각오로 충성했으나, 그것을 온전한 타의로 이루게 된 지금. 아직 앳된 손이 책상 위 서류를 들었다. 부욱. 무력하게 찢어지는 그것은 지원서였다. 이제 막 C급 헌터가 되어 동경하던 천명에 입사하고 싶었던 어린 날의 자신. 그러나 이제 그의 목표는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바닥을 수놓은 종이조각을 보는 그의 눈동자가 시리게 고정됐다. 천명의 첫 S, 길드장 원이소를 존경한다던 순수하고 고결한 문장은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흩어진 후였다. 참 어렸던 그때의 자신, 그 우인후는 정말이지 죽은 것이었다. 새롭게 하루를 맞이한 그는 직전의 시간을 뼈저리게 되새겼다. "피는 피로 갚아주지, 천명."


키보드에서 손을 뗀 주리가 이마를 문질렀다.

고개 숙인 그녀는 곧 눈을 가리고 생각에 잠겼다.


"난 분명 안 될 거야…."


어떻게 쓰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는 느꼈다.


"정말 웹소설처럼 쓰고 싶었는데, 이런 걸 누가 읽겠어."


자신이 쓰는 스타일이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인지한 그녀의 마음은 복잡했다.

잠시 우울감에 빠져든 주리가 목을 축였다.


"아냐. 갈아엎으면 돼. 고치다 보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어째 쓰기 전보다 더 갑갑한 시간이었다.


"대체 왜 인풋한 대로 글이 안 써지는 거야!"


한참이나 자신을 책망하고는 부여잡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는 그녀.

참담한 심정으로 고뇌한 그녀는 새 창을 열었다.

1일 차의 무한 반복이 시작되는 순간.


"단락을 나누고, 서사를 좀 더 뚜렷하게 하고, 음. 그, 아, 보여주는 방법으로 써야 해."


문제점을 나름대로 찾아낸 그녀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아예 주인공이 죽는 순간을 그려내기로 결정했다.

믿었던 천명 길드원들에게 배신당한 그때의 처절함을 끄집어내고자 연신 끙끙대는 주리.


"나 왜 이렇게 쓰면 너무 가벼워지지? 어느 장단으로 준비해야 할지 진짜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전혀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그냥 벗어나고 싶은 게 굴뚝이라, 의자를 뒤로 뺐지만 미처 일어서지는 못했다.


"으아, 다리 저려. 하. 못 일어나."


결국 포기한 채 다시 장면을 구상하는 그녀였다.


"더 비참하게 이끌어보자. 던전은 어떤 둥지가 좋을 것 같고, 천명이 거길 서로 으쌰으쌰 하면서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하면 너무 벗어났나?"


겉보기엔 사이좋아 보이는 모습을 연출해 더욱 큰 배신감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구간이 1화로서 정말 매력이 있는 걸까.

그녀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누가 나 대신 써줬으면. 아. 이래서 AI가 있는 거구나."


작은 깨달음을 얻은 동시에 위기를 직면한 그녀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어후, 일찍 일어났더니 피곤하네. 자지 마. 다 고쳐서 새로 쓸 때까지 해야 해. 큼."


미련할지도 모르지만 만족할 때까지, 그녀의 수정은 끊이지 않았다.

10시간 후, 늦은 저녁.

몇 번이나 재차 그려낸 1일 차의 회차는 밤이 깊어지도록 도달하지 못했다.


"다들 어떻게 해내는 거야. 내내 했는데도 이러면…"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진 주리는 수척한 얼굴로 침대에 들어갔다.

오늘은 주말이라 괜찮았지만, 내일은 출근이 있다.

출근하기 전, 퇴근해서는 2화를 써야 한다.

그 사실이 살짝 버거웠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에 편안함을 느낀 그녀는 눈을 감으며 소망했다.


"그래, 첫 글은 다 엉망이랬어. 어쨌든 이런 식으로라도 25일 동안 만들어가는 거야."


힘들다는 이유로 포기하며 핑계를 재방문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꼭 성공하고 싶은 웹소설 도전기.

까무룩 잠에 든 주리의 입매가 살짝 올라간 참이었다.

그래도 해냈다는 것이 뿌듯하게 다가왔기에, 긍정적으로 도는 회로였다.


-2일 차.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온 인후는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C급 헌터. 그리고 최종 A. 자신의 스펙을 떠올린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비록 A에서 그쳤지만, 그의 잠재력은 분명한 S. 그래서 등급 상승에 미친 듯 매달렸던 지난날,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이유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계속된 좌절과 참혹한 배신. 허황된 결말을 좌시하지 않은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파앗. 이제 막 생겨난 던전을 향해 몸을 던진 그는 들어오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인근은 조용했다.


"뭔가 이상한데."


일하는 틈틈이 글을 쓰던 주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몸을 던지며 주변을 살필 수 있나.

괜히 마음에 걸린 그녀는 내용을 빠르게 지웠다.

그리고 다시 업무에 복귀하고도 끊임없이 내용을 구상하려 애쓰는 주리였다.

이대로 성탄절까지 무사히 해낼 수 있기를.

25일 차의 주리는 과연 인후의 복수를 도울 수 있을까.

던전에 입장한 인후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달려갔다.

새 삶의 충분한 원동력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목도 안 정했네. 흠."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녀는 가제를 달아놓았다.

독식하는 강림자의 복수.

나중에 더 좋은 제목을 찾아야겠다.


'우인후의 숨은 설정을 보여주는 그날까지 힘내보자!'


케이크 위 촛불이 아른거리는 오전.

달콤한 내음이 기운을 북돋아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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