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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May 05. 2024

춤추는 고래의 마녀

2024_이야챌린지_029

[표지] 춤추는 고래의 마녀 (by.잰잰)

'엄마, 나 결혼해.'


카페 한구석에 앉은 소원이 속으로 되뇌었다.
직접 말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이였다.
모두가 죽은 줄 알았던, 그래서 장례까지 치렀던 그녀는 살아있었다.
비행기 사고에서 시신조차 찾지 못해 오래 실종 상태였다 결국 사망신고를 했다는데.
버젓이 숨 쉬는 그녀를 보니 다행인 반면, 아쉽게도 그녀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잊은 채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여자, 성소연.
처음은 가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저 닮은 사람일 줄 알았던 그녀가 진짜로 사진 속 엄마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꼭 그러고 싶었다.
16년.
엄마가 없던 시기.
익숙하지만 여전히 그립고 허전했던 그 시간에서 얼마나 바랐던가.
하지만 결국 붙잡지 못했고, 그것은 온전히 제 선택이었다.


'너무 행복해 보여서.'

새 남편과 새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 사이,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아니, 자신이 있을 곳은 이미 정해진 채였다.

'미워하지 않을게. 나도 새엄마와 언니랑 잘 지냈으니까.'

아빠와 재결합한 전 부인과 그 딸인 언니와 자신은 아주 친한 사이였다.
어린 날, 거부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는 금방 관계가 진전됐기에 매번 사무쳤던 것은 아니었다.
이따금 사진을 들여다보며 되새겼을 뿐.
또-

'참 감사하지.'

꿈 속 세계에서 알게 된 이는 꼭 엄마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자신이 알던 것보다 더 어리고 젊은 얼굴이었으나, 그리움을 상쇄하기 충분했다.

'비록 동일 인물은 아니었어도- 그렇게 생생하게, 앳된 엄마의 얼굴을 봐서 좋았어.'

그리고 지금은 진짜 그녀도 여기 있었고.
나눈 대화라고는 사장과 손님의 것밖에 없었지만.
이 기적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엄만 엄마대로, 난 나대로 행복하자."

언젠가는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오히려 먼저 찾아오겠지 싶다.
혹 영영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았다.
자신의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소원이 밖으로 나간 뒤.
테이블을 치우러 온 해정은 위에 놓인 종이를 발견했다.
청첩장이었다.

"어머, 놓고 가셨나 보네."

받은 걸 두고 갔는지, 자신의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오면 챙겨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이소원.
신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표지에 보이자, 해정이 웃음을 머금었다.

"좋을 때네. 결혼이라-"

자신도 좋은 사람과 만나 결혼했기에, 새롭게 맺어질 인연을 축복할 수 있었다.
카운터 쪽에 잘 보관해 둔 해정은 풋풋했던 과거를 회상했다.
찌르르.

'뭐, 완전히 옛 기억은 다 잊었지만.'

가끔씩 찾고 싶은 때도 있다.
정신을 차렸을 적에는, 지문이 전부 닳아있었고 나중에 어느 정도 회복된 다음 신원을 조회하려고 했지만.

'외딴 곳이었어서 나오는 데 시간이 걸렸지.'

그리고 그 사이, 이미 사망 처리가 되었는지 그녀의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또한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했으니, 답답해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외국인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왔지만.

'가족이나 지인을 찾으려 카페 일을 시작하긴 했는데.'

아직까진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아, 저 손님을 처음 봤을 때는 혹시나 자신을 아나 싶었지만.

'내 기우였지. 하긴. 젊은 아가씨가 날 알 리가 있나. 내 조카인 게 아닌 이상.'

자신이 과거에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해정이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쳤다.

'흠. 내 나이도 확실하진 않지만.'

그녀는 엄청 동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나이를 오해할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발견 당시 20대로 추정되는 그녀가 사실은 30대였을 거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해서, 본 나이보다 5-6살 정도 어린 지금.

'솔직히 괜히 과거가 두렵기도 하고.'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현재였다.
자신을 구해준 남자와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아 잘 지내는데, 굳이 파헤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다가 감당하지 못할 사실을 마주한다면.

'그렇다고 손 놓고 지낼 순 없지. 여기서 일하다 보면 아는 사람이 말 걸 수도 있는 거잖아.'

그리고 그게 무서워서 은둔 생활을 하는 것도 이상했다.
뭐,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며 알아볼 생각도 없었지만.
이 삶에 충실하면서 우연히 알게 되는 것들만 취할 예정이었던 해정은 문이 열리자 밝게 인사했다.
한편 이름마저 바뀐 엄마에 대한 생각을 털어낸 소원은, 강변을 따라 걸었다.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가 계셨다면-"

어쩌면 자신도 용기 낼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엄마는 어릴 때 부모님을 잃은 고아였다.
그래서 일찍이 안정된 가족을 갖고 싶어 했다던 그녀.

'아빠는 재혼이었지만. 새엄마랑 안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었으니.'

어렸던 소연에게 소원의 아빠인 형원은 꽤나 젠틀한 신사였다.
첫 직장에서 만나 빠르게 가까워진 두 사람.
특히 신입인 그녀에게 직급 높은 그는 자상하고 존경의 존재였으니, 관계는 긍정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양육권 문제도 없었다고 했고.'

초혼이 아닌 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을 넘어설 정도로, 좋았기에 소연은 어렵지 않게 결정할 수 있었다.
출장 때문에 탄 비행기에서 사고가 나서 결국 사별하게 되었지만.

'아빠도 많이 힘들어했었지.'

그 시절을 같이 이겨내 준 게 지금의 새엄마, 문소라.
이후에는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서 언니만큼, 아빠보다 더 자신을 챙겨준 고마운 분이었다.

'내가 하는 이상한 얘기도 편견 없이 들어주셨지.'

현실과 꿈을 혼동했던 어린 시절.
아빠도 믿어주지 않았던 것을, 그녀는 꼬박 들어주었다.
그것을 타이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해 준 덕분에 점차 구분하고 정리하게 되었는데.
또 독립한 지 꽤 되었는데도 항상 챙겨주신 것도, 이번 상견례에서 눈물을 보이신 것도.
그녀는 분명한 자신의 어머니였다.

"이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을래."

휘잉.
자리에 멈춰 선 소원이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머리카락이 자유롭게 휘날렸다.
정말 어지러웠던 이야기의 끝.
미처 찾아내지 못한 진실.

'더 이상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을 거야.'

꿈 속 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등한시했던 것들을 하나씩 들출 때마다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감히 이것을 누릴 자격이 제게 있는 걸까, 걱정도 되지만.

'바보같이, 이런 나 때문에 고생한 그들을 떠올리면'

어쩌면 아직 용서받지 못한, 쉬이 용서할 수 없는 과오가 남아있지만 지금은 나아가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러길 바랐다.
다시 다리를 움직인 그녀가 반짝이는 물결을 쫓았다.
자신도 저렇게 찬란할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걸까.
돌아오지 않는 답을 구하며, 길을 걷는 소원이었다.
한 달 후, 신부대기실.

"언니, 너무 예쁘다~"

청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소원을 보고는 연신 감탄했다.
그녀의 칭찬에 수줍게 웃은 소원이 찾아온 친구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고마워~"
"신랑은 정말 좋겠네~"
"나도 그래~"
"언니, 결혼하고 날 잊으면 안 돼~"

한 무리가 떠나고, 친한 직장 동료들과도 사진을 찍은 다음.
어느새 식 올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빠, 떨려요?"
"큼. 한 번 해봐서 익숙하다."

언니가 결혼할 때를 떠올리는지, 덤덤한 척 하는 그였지만.
어깨는 속일 수 없었다.

"그래요. 그럼 전처럼 손 놓는 거, 잊지 말아요."

한참을 넘겨주지 않아서 곤란했던 언니 결혼식을 회상한 소원이 주의했다.
형원은 답하지 않았다.
금쪽같이 키운 딸을 또 보내야 한다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벌써부터 붉어진 눈시울을 보자 소원의 눈가도 먹먹해졌다.

'후. 어제 한참 울었는데도 이러네.'

신부 화장을 생각해 준 언니가 엄마와 함께 지금 오열하자고 해서 이미 몇 시간 전에 눈물을 다 빼고 온 참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아직도 나올 구석이 있었나 보다.
시큰해진 코를 간신히 넘긴 소원은 호명이 들리자 정면을 바라봤다.

"아빠, 우리 가야 해요."
"괜찮겠니?"
"괜찮지 않은 건 아빠뿐 일걸요. 빨리 가죠."

감동이 바사삭된 형원이 겨우 걸음을 옮겼다.
묵직하고도 느린 이동이었으나, 결국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잘 부탁하네."
"맡겨주십시오."

래인의 당당한 대답이 흡족스러웠는지, 그는 오래 시간을 끌지 않았다.
주례가 계속 이어지고, 결혼식을 진행해 주는 래인의 지인이 분위기를 올려주었다.
이윽고 축가 시간.
태준의 소개에 등장하는 어린 친구들.
태권도장 아이들이었다.

"하하, 애들이 참 기운차네."

모든 축가가 끝나자, 진정으로 하나된 이들이 행진했다.
결혼식의 막이 내리고, 단체 사진을 찍은 뒤.
바쁘게 감사 인사를 하며 차에 오른 둘은 공항으로 향했다.
식이 일찍 끝나 당일에 출발하는 그들이었다.
운전하는 래인 옆으로, 소원은 찾아온 이들에게 따로 연락을 넣었다.

"쉬엄쉬엄해~"
"아니야. 이런 건 바로 챙겨야지."
"오늘 고생했어. 고마워."
"자기야말로, 수고 많았어."
"당신보다야 힘들 것도 없지."

오고 가는 고마움 속에서 더욱 단단해지는 둘.
피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큰 기쁨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
입장 때만큼이나 더 벅차고 감동적일 나날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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