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한 가족을 책임지게 된 형의 짐을 덜어주지도 못할망정, 벼랑 끝에서 밀어버린 스스로가 쉬이 용서되지 못할 날이었다.
"그냥 형하고 다시 축구하고, 게임하던 때로 돌아가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데-"
너무 어렸다는 말로 지우기에는, 그의 나이도 너무 찬란하던 때였다.
25살, 그 꽃 같은 시절.
눈앞에 놓인 꿈을 미처 이루지도 못한 채 떠나버린 형, 강어린.
어린이날에 태어나 그 주역으로 선물을 받았어야 하는 그였는데.
당시 초등학생이던 자신은,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선물을 받은 친구들이 부러웠고.
자신도 꼭 그것을 얻어야만 하는, 갖고 싶은 욕망이 컸다.
그리고 그 과욕이 불러온 참사는 영원토록 가슴을 짓이기는 것이었다.
"결국 타지도 못했어."
결국 병원에서 숨진 그의 소지품으로 전달받은 킥보드.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그게 목숨과 바꿀 정도로 탐이 나던 것도 아니었는데.
"누나는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날, 거길 가게 만든 게 나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네."
상품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음주운전 차량에 치인 형.
그래서일까.
방치된 탓에 골든타임을 놓친 그에겐 때늦은 수술이었다.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는데, 염치없다는 거 알지만 형. 나는-"
부모를 잃은 아이는 고아라고 하지만, 아이를 잃은 부모는 마땅히 지칭하는 단어도 없다.
자신은 한평생 모를 줄 알았다.
그래서 부고 소식에 놀란 어머니의 마음을, 그 자리에서 통곡하는 속내를 짐작조차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 마음을 절실히 알았던 시간 속에서 형 생각이 많이 났는데. 그게 기만이라 할지라도, 형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할게."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킥보드와 달리 바랠 정도로 들여다본 편지는.
함께 전달된 편지 속에는 그런 문장도 있었다.
-산타, 네가 바라는 건 형이 뭐든 해줄 테니까 건강하기만 해라. 아니, 그것 말고도 항상 씩씩하게 웃고 행복해라. 그게 너랑 이브가 하는 효도니까 말이야.
정갈한 글씨체가 남겨준 의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던 때는,
"…어쩌면 누나 말이 맞으면 좋겠어."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던 때에, 그녀는 말했다.
세계의 분기점에 들어온 우리가 잃은 대신 온전하게 구축했다던, 이해되진 않았지만 믿고 싶은 희망의 선.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형마저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어떤 세계가 있다고.
"그 다른 세계에서, 형이 부모님과 행복한 게 맞다면- 그럼 나도 조금만, 조금만 더 행복할게."
콜록.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강산이 연신 기침하자, 하얗던 색이 점차 붉어지기 시작했다.
"못난 동생이라 미안. 건강…"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은 혼자 감내할 때였다.
이제야 딸의 건강도 찾고, 또 20년 전 잃었던 아들도 돌아왔다.
그 사이에서 그동안의 고통을 잊고 행복하기만 해도 모자란 아내에게, 다른 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못해도 내일모레까지만이라도 괜찮았으면 좋겠네."
지난 추석, 누나의 집에 방문했던 날.
쓰러진 설하가 걱정된 것도 잠시.
믿을 수 없는 이름의 남자가, 조카의 방에서 나올 때 느꼈던 그 혼란스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 밤 꿈에서 먼 과거라 할 수 있는 전생을 깨달았으니까.
그래서 이 기적을 외면하지 않고, 그를 더 이상 이유의 방에 두지 않고 우리 아들의 자리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었는데.
"…떨어진 시간이 길어서 서먹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족이라는 건 분명해서, 노력하고 있는 참이야."
핸드폰을 꺼낸 그는 얼마 전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 자리 잡은 아이들은, 자신의 자녀이기도 했지만.
"형 조카들. 훌쩍 컸지? 만약에-"
다시 1년 뒤에는, 항상 보던 조카인 이유 말고 처음으로 형에게 소개하고 싶다.
그동안 아파서 오지 못했던 딸, 설아.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아들, 설영.
"우리 애들도 삼촌 사랑 듬뿍 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그동안 독점했던 이유를 보며 내심 그 자리에 설영과 설아가 있길 바랐던 때도 있다.
외삼촌인 자신의 생각을 알면 이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여기 내가 못 오더라도, 만약 애들이 온다면-"
목이 매였다.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그 찬 바닥에서, 얼마나 힘겨웠을까.
외로웠을까.
고스란히 넘겨받은 가장의 무게에, 힘이 부쳐 잠시.
아주 잠깐 쉬어가고 싶은 때였다.
"이강산, 일찍 왔네."
"어, 왔어?"
이제 막 납골당에 도착한 이브는 강산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런 그녀와 눈을 마주친 강산은 옅은 미소로 누나를 반겼다.
"나와봐. 나도 오빠랑 말 좀 하자."
"그래."
"오랜만이야, 어린 오빠. 올해는, 아니 정확힌 작년 말부터라고 해야겠지. 그때부터 세상이 요지경이 됐는데. 아, 여기는 던전이란 것도 생겨나고 세상이 많이 이상해졌어. 그래서 어차피 찢긴 세계를 더 건드린다고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긴 한데. 보니까 잘 살고 있더라. 원하던 바텐더 일도 계속 하고 있고, 새벽 언니랑 여전히 깨도 쏟아지고."
"그건 또 무슨 얘기야?"
"있어 봐. 내가 최근에 친구 만나고 와서 보고 온 거거든. 뭐, 좀 지난 일이긴 한데. 아무튼 가끔씩 찾아갈 때마다 좋아 보이더라고. 그래서 이참에 두 번째 조카 납치 계획을 세울 참이야."
이브의 말을 듣던 강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놀라서 눈이 커진 동생을 보는 이브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흐음. 그런데 조카가 셋이나 되네? 그리고 말이야. 새벽 언니가 보건 선생님이거든?"
"대체, 콜록. 알아듣게 좀 얘기해 봐."
"시한부가 된 동생을 위해, 그리고 작은 아빠를 위해서 기꺼이 와줄 거란 거지. 예측하기로 오빠 딸인 이슬이는 힐러로 각성할 여지가 충분하니까."
강이슬.
데려오면 이유와 참 친해질 것으로 보이는데.
이브의 눈이 휘어졌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형한테서 딸을 뺏는 건 반대야."
"글쎄?"
"유골함에 뭔 짓을 한 거야?"
"이건 옛 저녁에 손본 거야. 내가 예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천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축이었는데 인간 됐다고 이 정도도 못할까 봐."
유골함의 세차게 흔들리자 지켜보는 강산의 눈빛도 덩달아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럼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이브는 비축해뒀던 힘을 개방했다.
파앗.
청색의 빛이 공중을 일렁였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침없는 손길이 갈라진 공간을 훑자, 한 인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앗!"
세상을 이주한 15살의 아이가 눈을 굴렸다.
"엇, 정말이네요! 천사 고모!"
"아는 사이야?"
"사전 작업은 미리미리 해뒀다니까."
이슬을 일으켜 세운 이브는 기분 좋게 웃었다.
내일모레 유원지에 데려갈 일행이 한 명 더 는 참이었다.
'홀수보단 짝수가 낫지.'
이브가 그런 생각을 할 동안, 강산은 이 상황을 태연스레 받아들이는 두 사람이 이해되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정말 괜찮은 거야?"
"네! 흥. 어차피 아빠랑 싸워서 가출할 생각이었는데 잘 됐죠, 뭐!"
"형이랑 싸워…?"
이슬의 당당한 기색에서 왠지 설아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 강산이 생각을 비웠다.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는데, 그게 조카란다.
아들도 그런 마당에 굳이 딴지를 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그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의 결정과 상관없이 이브는 이미 이슬을 데리고 이동하고 있었다.
"작은 아빠는 같이 안 가요?"
"따로 와서 괜찮아. 그리고 내일모레 같이 놀이공원 가기로 약속했으니 그때 보면 돼."
"와. 놀이공원이요?"
아직은 기대하는 나이여서 그런지,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외갓집에는 자주 가서 놀았지만, 친척 집은 할머니 댁 외에는 처음인지라 더 신이 나는 것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