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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Festina L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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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Jan 09. 2020

천천히 서둘러라

'Festina Lente' 하기로 했다

라틴어 수업



 라틴어 교양 수업을 들었다. 금요일 오전 9시,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운동화를 질질 끌며 들어오는 학생들을 반기는 건 칠판 위에 고대 현자처럼 자리 잡은 라틴어 문구였다. 교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기 전 항상 라틴어로 된 문구 하나를 소개하곤 하셨다. 한 마디로 '오늘의 라틴어' 코너였다. 그 중엔 라틴어 격언도 있었고 노래 가사도 있었는데, 알아두면 잘난 척 하기에 제격이었다. 하루는 칠판 위에 딱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Festina Lente




 겉보기에 단순한 이 두 글자에 담긴 뜻은
 ‘천천히 서둘러라’ 였다.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린가 싶었다. 서두르면 서두르는 거지 천천히 서두르는 건 또 뭐람. 어거지로 끼워 맞춘 말 같다는 것, 하지만 다른 문장들에 비해 짧아서 좋다는 것 정도가 'Festina Lente'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렇게 간명하다는 이유로 별 뜻 없이 외워뒀던 두 글자가 좌우명이 된 건 지독한 소화 장애를 겪고 난 뒤부터였다.




불행하고 재미없는 모범생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바로 옆에서 피구를 하는 동안에도 공부를 했다. 3년 동안 야자까지 개근을 했고, 청소시간, 점심시간, 저녁시간 모조리 털어서 공부에 열중했다.
 대학생이 되고서도 그 흔한 출튀 한 번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알바든 운동이든 몸져 누울 정도가 아니면 절대 빠지지 않았다.
 일 년, 반 년, 한 달, 일주일, 하루, 한 시간 단위로 촘촘히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움직였다. '할 일 다 하고 놀아라' 라는 잔소리가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어림 반푼 어치도 없을 때, 나에게 만큼은 깊숙이 파고 들어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저주라도 된 모양이었다. 약속을 미루고 미루는 나를 두고 친구들은 연예인이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그저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고 학점도 놓칠 수 없었으며, 대외활동도 해야 했고 자취방은 깨끗해야 했으니ㅡ아침에 눈을 떠서 잠에 들 때까지 시간을 허투로 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위가 멈췄다.' 의사선생님 말에 따르면 그랬다. 위장 기능 장애가 극도로 치달았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루에 밥 한 그릇을 넘기지 못해 50kg를 조금 넘던 몸무게가 40kg 중반대까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의사는 한 템포 쉬어 가라고, 힘을 좀 빼고 살라고 조언했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쉴 시간이 어딨냐며 투덜거렸지만, 최소한의 당분에만 의지해 4개월을 보내는 동안 속으로는 그간의 삶에 대한 회의감이 소용돌이 쳤다.


 시간을 빡빡하게 쪼개 쓰는 성격덕분에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고, 밥 한끼도 못 먹는 와중에 올A+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성적표가 띄워진 모니터에 비친 수척한 얼굴을 본 순간, 씁쓸함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자부했으나, 그 이면엔 스스로에게 가한 채찍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소화 장애는 그 수많은 상처 중 하나가 곪아 바깥으로 터져나왔을 뿐이었다.


 




 하루 24시간을 '필요'와 '효율'에 의해서만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모든 순간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나를 짓눌렀다. 의무가 선호를 한참 앞섰다. 시간관리 능력과 절제력을 취한 대신에, 융통성이나 여유로움을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은 스스로를 진물나게 했다. 변주가 없는, 변주 따위 허용하지 않는 일상이 점점 지겨워졌다. 그러니 나는 만년 모범생이었던 거다. 불행하고 재미없는 모범생.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제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을 억척같이 붙들고 살아온 
결과가 만성 소화장애와 뫼비우스 띠같은 스트레스의 굴레라면,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벗어나야만 했다.




인생은 서두르되, 하루는 천천히 살기



 내가 찾은 새로운 삶의 방식은 공교롭게도
'Festina Lente' 였다. 여유롭지만 열심히 살고 싶은 모순적인 욕구에 걸맞는 모순적인 문구라고 생각해서였다. 다만, 어떻게 천천히 하고(Lente), 무엇을 서두를 것인가(Festina)를 정하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지난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인생'은 서두르는 대신 '하루'는 천천히 살자는 것이었다.  매모호한 생활방식을 위해 나름대로 세운 원칙은 이랬다.  



현재에 집중하자

Daily 보다는 Monthly 계획 / 반드시 해야 하는 일만 무리 없는 수준에서

욕심나는 대로 버킷리스트를 적는다.



 '천천히 서두르기'라고 명명한 이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미 꽤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고지식하고 계획적인 사람에게 이는 일상적인 혼란을 가져오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고쳐먹은지 반 년이 넘어가는 지금, 아직까지는 'Festina Lente' 식으로 사는 일에 매우 만족하는 사람으로서 천천히 서두르는 삶에 대해 자세히 나눠보려고 한다. Festina Lente를 위해 스스로 세운 기준들과, 다르게 살기 시작한 이후 겪었던 시행착오, 천천히 서두를 때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도.

 

 이 글은 쓰는 지금도 나는 천천히 서두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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