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estina Lent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채 Jan 26. 2020

카메라, 고장나길 잘했다

Festina Lente 첫번째 원칙 : 순간에 집중할 것

사연 모를 사진들



 2018년 9월 26일,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공항에 도착한 지 5일만에 카메라가 고장났다. 알고 보니 내가 가진 카메라는 렌즈가 워낙 잘 깨져서 '유리렌즈'라는 별명이 붙었더라. 희대의 덜렁이인 나를 주인으로 둔 카메라가 지금까지 잘 버텨준 건 순전히 운이었던 셈이다.


카메라가 고장나기 전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A/S센터에서 수리까지 최소 2달, 수리비는 15만원 이상이 소요된다는 허탈한 설명을 듣고, 나는 카메라를 고치는 걸 포기했다. 한동안 얼마나 망연자실 했는지 모른다. '왜 하필 체코에서 카메라가 고장나는거지?', '한국에서 고장났으면 금방 고쳤을텐데'


 카메라때문에 상한 속을 끌어안고 예전 사진을 들춰보던 중, 우연찮게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3년 전 유럽 여행을 다니는 동안 찍었던 사진들은 들여다볼 때마다 여전히 오감을 자극하는 반면, 최근에 찍은 사진들 중에는 사연 모를 사진들이 눈에 자주 띄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왜, 어디서, 누구와 이 모습을 보고 있었던 걸까? 이제껏 사진에 대해 기억 못했던 적이 없었는데...당황스러움이 나를 무심하게 치고 간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 시작점을 차분히 곱씹어 갔다.




카메라, 고장나길 잘했다 


 

나의 포토북들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내가 아낌없이 투자했던 건 여행, 책, 운동 이렇게 3가지 였다. 이 세 가지 중 여행과 책의 교집합인 포토북을 위해,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모아 포토북을 만들었다.

 지금 책장에는 총 4권의 포토북이 꽂혀있다. 한 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지난 3년을 회상하기 위해, 다른 하나는 첫 해외여행이었던 오사카-교토 여행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두꺼운 포토북은 혼자 떠났던 한 달 간의 유럽여행, 가장 최근에 만든 포토북은 2017년 캐나다 빅토리아 섬에 머물 때의 이야기를 담았다.

 


Plitvice(Croatia) / Ravello(Italy)
Split(Croatia) / Roma(Italy)



 사진을 찍었던 이유는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나만의 시선으로 매만지고 싶어서였다. 멋있고 아름다운 사진은 구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존재, 그것을 둘러싼 냄새와 소리,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사진 한 장에 모두 녹여내는 건 온전히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벽에 엉덩이를 스치며 지나가야 하는 골목길, 맑디 맑아 수면 아래와 위가 구분이 되지 않았던 호수, 가슴이 찌릿할 만큼 성스러웠던 성당, 친구와 속얘기를 터놓았던 별 볼일 없는 광장...내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곧 '순간을 농축시키는 행위'였다.


 하지만 포토북을 만들면서 부터 서서히 본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포토북 자체가 아니라 포토북에 집착하는 나의 태도였다. 포토북에 공을 들이기 시작한 이후, 평생 가져가고 싶은 순간을 제대로 담아내는 게 아니라, 포토북을 구성하기 좋은 피사체를 골라내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되어갔다. 사진으로 붙잡아두고 싶을 만큼 가슴이 아린 순간이 아니라, 남들에게 자랑하기 좋은 빛좋은 개살구를 찾아내기 급급했던 거다.


 이런 생각이 들고 나니 카메라가 고장난 게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감각으로 돌아가 눈으로 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며 충분히 느껴보자 싶었다.




순간(瞬間) : 깜짝할 순, 사이 간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 비엔나에서 교환학생을 하는 친구가 프라하에 놀러왔다. 시린 아침 공기에 딱딱하게 굳어 버린 돌길을 종종걸음으로 건너 중앙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하릴없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한 분이 중앙역 한 가운데에서 자신과 비슷한 세월을 살아낸듯 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쨍한 주황빛 점퍼를 입은 한 남자가 있었다. 계획된 버스킹이라기엔 서로 아는 사이 같지 않았다. 남자가 한참동안 할아버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연주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제 멜로디를 얼추 파악한 모양새로 서서히 몸을 일으키더니 왼손은 바지주머니에, 오른팔은 피아노에 의지한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세만큼이나 여유롭고, 옷색깔만큼이나 화끈하게.


Prague Central Station


 그 순간, 나는 핸드폰으로 카메라 버튼을 누르기 전 두 사람의 하모니와 이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촉수를 세웠다. 11월의 찬기와 기차역의 텁텁함이 뒤엉킨 공기, 지금 막 프라하에 도착한 여행자들의 상기된 표정,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들뜬 얼굴, 그리워질 얼굴을 끝까지 붙들고 싶어하는 눈빛, 노래에 맞춰 살랑살랑 춤을 추던 할머니, 음악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피아노를 알기는 할까 싶은 작은 아이가 무대로 난입하는 순간까지.

 

 만약 두 남자를 멋내기용으로 촬영했다면 1년이 지난 지금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까? 이 영상을 볼 때다 생각한다. 아무 감정없이 남긴 기록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도 사라지지만, 순간에 완전히 녹아든 채 남긴 기록은 오래될수록 윤기있게 빛난다는 것을. 


 




 한국에 돌아와 카메라를 고쳤다.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들은 포토북 대신 블로그에 꼼꼼히 정리했다. 여전히 나는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이제 얼굴은 아는데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었을 때처럼 사진을 들춰보다 어색해지지는 않는다.

 우리의 시간은 깜짝할 사이에 지나쳐가는 아주 작은 순간(瞬間)들이 빽빽히 물리면서 흘러간다. 그리고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게 해주는 카메라는 이 시대 최고의 발명품이다. 하지만 집중하지 않은 기록은, 실수로 셔터가 눌려 찍힌 흔들리는 아스팔트 사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무엇이 먼저인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사진이 먼저인지, 지금 이 순간이 먼저인지.


 순간에 집중하자는 건 'Festina Lente(천천히 서두르기)'의 첫 번째 원칙이다. 내가 서있는 이 순간, 이 상황에 몰입할 때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하루 24시간 중 단 1분이라도, 당신의 모든 감각을 살려 현재에 몰입해보는 게 어떨까. 무엇이라도 좋다. 매일 아침 걸어나오는 골목길 담장에 흐드러진 능소화든, 하룻밤 사이에 제 몸을 부스러뜨릴 준비를 하는 나뭇잎이든, 사랑하는 이의 눈가에 부드럽게 걸친 잔주름이든, 밤길을 지나다 당신의 창문에 툭 걸린 달빛이든그래야 우리의 삶이 흔들리는 아스팔트 사진처럼 나조차도 모르는 시간들로 점철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를 등떠밀며 미친듯이 달려가는 시간에 잠시 태클을 걸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고삐를 쥐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천천히 서둘러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