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쪼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철저히 지키는 삶은 변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맹점이 있다. 계획이라는 건 유연하다 못해 무른 반죽과 같아서,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얼마든지 틀어진다. 정글을 헤집고 다니는 탐험가처럼 예기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덩쿨들을 낫으로 쳐낼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아무리 대단한 탐험가도 미쳐 발견하지 못한 나무줄기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철퍽ㅡ하고 꾸덕꾸덕한 진흙으로 온 몸이 범벅이 되었을 때, 계획적인 사람은 별 수 없이 짜증이 난다.어쩌면 그런 짜증때문에 10분, 20분이 흘러가는 것조차 그들은 낭비로 느낄 것이다.
On the way to Brno
과거의 나는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도 될 시간조차 아까워 했다. 강의 중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공부를 했고, 식사가 길어지면 초조했다. 과제가 많아 복습을 하지 못하면 다음주에 배가 될 복습량을 걱정하며 잠들었다. 총체적인 심리상태를 100이라고 한다면 초조함, 불안함 따위의 감정들이 70이상의 공간을 차지했다. 그런 내게 브르노와 올로모우츠 여행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핸드폰이 잠겼다, 아니 내가 잠갔다.
프라하 생활에 차츰 적응하기 시작했을 즈음, 인턴 동료이자 하우스메이트인 D와 근교 도시 브르노(Brno)와 올로모우츠(Olomouc)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브르노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올로모우츠로 이동했다가 프라하로 돌아오는 짧은 일정이었다.
브르노에 도착하기 직전 잠에서 깨어나 핸드폰으로 정보를 찾아보던 중이었다. 오래된 핸드폰이라 자꾸 오류가 났고,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 전원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 순간, 아차! 싶었다.
핸드폰을 재부팅하면 PIN번호를 입력해야만 잠금을 해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PIN번호를 외우지도, 따로 적어놓지도 않았던 거다. 여행지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일이 꼬였다는 생각에 화가 났고 D에게 너무 미안했다. 혼자 먹통이 된 핸드폰을 붙들고 끙끙거리다브르노 땅을 밟기 직전 D에게 이실직고를 했다.
"미안한데, 핸드폰을 못 쓰게 됐어."
체코의 토요일 오후는 명백한 휴일이었고주변엔 운영 중인 대리점이 없었다. 집요한 검색 끝에 우리는 외곽에 위치한 대형 쇼핑몰 안에 통신사 대리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40분이 넘는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엔, 허허벌판과 대형 쇼핑몰 TESCO, 누가봐도 TESCO 때문에 깔아놓은 도로가 전부였다. 다행히 직원이 영어를 잘하는 편이라 상황을 설명하고 빠르게 핸드폰 잠금을 해제할 수 있었다.
Brno, Czech Republic
문제는 시간이었다. 핸드폰을 정상화했을 뿐인데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짐도 풀지 못해 체크인부터 해야했는데, 알아보니 쇼핑몰에서 숙소까지 30분도 더 걸린다는 거다. 짐을 내려놓고 저녁을 먹으면 하루가 끝날 판국이었다. 소중한 주말에 훌쩍 떠난 여행인데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버렸다는 사실이 속상했고 D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시내까지 10분 거리, 두 시간을 헤매다.
그렇게 브르노에서의 하루를 마치고 올로모우츠로 넘어갔다. 버스터미널에 내린 후, 직원과의 격렬한 바디랭귀지 끝에 4번 플랫폼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 말 한 마디를 티켓처럼 붙잡고 기다린지 한 시간이 넘게 흘렀지만, 단 한 대의 버스도 시내로 나가지 않는 거였다.
Olomouc, Czech Republic
결국 우리는 우버도 운영하지 않는 유령같은 도시에서 콜택시를 불러야 했다. 혹시 몰라 품고 다녔던 작은 체코어 회화책을 부적처럼 꺼내 '택시부르는 법'이라는 챕터를 펼쳤다. 전광판에 써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 어눌하다 못해 제대로 된 말인지도 모르는 체코어를 주절주절 쏟아냈다. 놀랍게도 상담원은엉망진창인 내 발음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10분 정도 후에 택시가 도착했고, 우리는 2시간의 방황끝에 10분만에 다운타운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프라하로 돌아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4시간 남짓이었다. 브르노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정이 틀어질 대로 틀어진 채 올로모우츠를 속성으로 둘러봐야만 했다.
시간을 버렸을 때, 우린 웃었다
시간의 효율성이나 계획의 측면에서만 보면 1박 2일의 여정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엉망이 된 일정을 소화하면서 우리는 조심스레 들고 가던 케이크를 떨어뜨린 아이들처럼 서로를 힐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도시에서 어느 때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며, 여행을 반추할 때마다 행복했던 기억들에 걸려 넘어지곤 한다.
Brno 숙소
그게 가능했던 건 무엇보다도 D의 여유로움 덕분이었다고생각한다. 브르노에서 대리점을 찾아 TESCO에 갔을 때, D는 다른 매장을 구경하고 있겠다며 악의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거운 배낭을 맨 채 버스만 타고 다녔을 때도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를 고민할 뿐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상대에 대한 배려나 친절, 그 이상의 어떤 '여유로움'이었다. 대책없이 느긋한 것이 아닌구겨진 시간을 차분히 펼쳐놓고, 앞으로의 시간을 하나하나 이어붙일 수 있는 단단한 여유.
Spilberk Castle, Brno
D가 어그러진 시간들을 견뎌준 덕에 나 역시 미안함이나 피곤함, 짜증, 후회같은 것들은 잠시 넣어두고 남은 시간을 즐기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나름 명소인 슈필베르크 성에 마감 직전에 들어갔다. 한 때 죄수들의 감옥이자 요새로 사용되었다던 슈필베르크 성의 기구한 삶을 충분히 뜯어보고 노을로 물드는 브르노를 지켜보았다. 시내에서 우연찮게 마켓을 발견했고, 현지인들 틈에 섞여 뱅쇼를 마시고, 이름 모를 빵을 뜯어먹었다. 맛집을 찾아갔으나 자리가 없어서 허탕을 친 뒤 어디서나 먹을 수 있을 법한 햄버거와 샐러드를 먹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Muzeum Umeni Olomouc
올로모우츠에서도 우리는 버스터미널에서 시내로 가지 못하고 날려버린 2시간을 아까워하기보다, 체코어로 콜택시를 부르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더 희열을 느꼈다. 화장실 때문에 들어선 올로모우츠 미술관에서 우연찮게 무료 전시회를 보게 되어 한껏 기분이 들떴다. 정처 없이 떠돌다 발견한 성당이 다른 성들보다 수수하고 담백해서 마음에 든다는 대화를 나누었다. 겉옷을 꽁꽁 싸맨 모양의 가게들이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듯한 광장을 바라보며 체코에서 이 도시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말했다.
Olomouc, Czech Republic
핸드폰을 고치느냐, 다운타운에 가는 법을 몰라허비한 시간에 집착했다면 어땠을까? 온갖 변수들로 얼룩진 계획을 부여잡고 있었다면 지금의 나와 D가 당시의 일을 꽤 괜찮은 여행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D가 크리스마스 연휴에 연인과 함께 다시 올로모우츠를 찾았을까?
Brno, Czech Republic
계획을 촘촘히 세우고, 이를 지키고자 하는 강박은 불가피한 변수조차 부드럽게 끌어안지 못하게 하고, 신경을 날카롭게 만든다.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은 시간이 더러운 휴지조각인냥 과거의 끄트머리를잡고 불쾌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어도 그 시간 역시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은 변하지는 않는다.정해진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가는 동안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에 어떤 변주가 생겨도 뒤틀린 시간들을 멋있고 알차게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서도 그렇다. 늘 시간을 아까워 하고 칼같이 쪼개어 쓰는 사람이 당장은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은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변주를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은 실수로 그은 선 하나에 집착하기보다 거기서부터 다시 그림을 유려하게 이어가 작품을 완성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변주에 당황해 스텝이 꼬이기보다, 바뀐 멜로디에 흥겹게 몸을 흔들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불필요한 감정 낭비를 하지 않으면서 현재와 미래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유야말로 허둥대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Lente), 목적지를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Festina)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