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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Mar 06. 2020

번개는 삶을 파괴하지 않는다

Festina Lente : 성취감보다 더 달콤한 것

급만남은 사절입니다



 한창 '번개'라는 말이 쓰였던 때가 있다. '언제 시간 괜찮아?'로 시작된 약속이 아니라, '지금 뭐해? 놀자!'로 이어진 번개 같은 만남을 뜻했다.

 하지만 나는 번개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미 일주일, 한 달 동안 완벽하게 구상되어 있는 나의 스케쥴에 금이 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쉬기로 마음먹은 날 친구가 불러내면 '오늘은 쉬어야하기 때문에'라고 솔직히 말하고 거절하곤 했다. 생로병사 관련된 불가피한 사건때문이 아니라면 1년 365일이 오롯이 나의 주도권 하에 굴러가길 바랐으므로.


상사와 근교 여행 가기


 

집 근처 카페_내가 원했던 주말



 2018년 10월 마지막 주 주말 플랜은 휴식이었다. 지난 주말 D와 근교 여행을 갔다온터라 한 주 쉬어가야 체력이 회복될 것 같았다. 그렇게 프라하에 도착한 이래 가장 평범한 주말을 꿈꾸던 어느 날, 업무 지시를 끝내신 책임님께서 갑자기 주말 일정을 물어보시는 거였다. 불길했다. 그게 무엇이든 거절하고 싶었다. 질문 한 번 시들시들해지는 게 책임님은 마지막 한 마디를 날렸다. '주말에 같이 여행가자. 아는 동생들이 프라하에 놀러오는데 너희 또래거든.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얼마든지 거절해도 괜찮아.' 






 단언컨대 책임님은 좋은 분이셨다. 반 년이면 떠나버릴 인턴이 아무리 자질구레한 질문을 해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열정적으로 업무를 가르쳐주시곤 했다. 회식이 끝나면 당신의 집과 반대 방향인데도 늘 집 앞까지 데려다 주셨고, 가끔 맛있는 점심도 사주셨다. 하지만 책임님이 아닌 그 누구라도 일상에 불쑥 끼어드는 걸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라, 책임님의 제안이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인턴 입장에서 상사의 제안을 거절한들 마음이 편할 것 같진 않았다. 결국 D와 나는 책임님의 아는 동생이자 우리에겐 초면인 언니 두 사람근교 까를로비 바리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



인생 최고의 번개



 책임님과 약속한 날 아침, 원래보다 출발시간이 늦어질 거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편함과 투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라왔다. '그냥 거절할 걸', '새로운 사람을 대하려면 피곤하겠지', '나이 차이도 있어서 재미를 기대하기는 힘들겠다.' 앞으로 펼쳐질 시간들에 대한 부정적인 예상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계획을 깔끔하게 무시했던 책임님의 급작스러운 '번개'요청은 이제껏 내 인생에 들이닥친 번개 중 최고의 번개였다. 까를로비 바리는 실수로 수채화 물감통을 엎어버린 것처럼 아름답게 채색된 도시였다. 그 유명한 체스키 크롬로프보다 더 동화마을 같았다. 작은 강이 도시를 가로지르고, 10월에 이별을 고하며 나뭇잎들을 한참 떨궈내는 바람에 듬성듬성 이빨빠진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까를로비 바리 Karlovivary
까를로비 바리 Karloivivary



 프라하보다 훨씬 따듯한 색감을 지닌 까를로비 바리는 물도 그런 모양이었다. 온천의 도시 까를로비 바리 시내를 걷다보면 김이 폴폴 흩어지는 온천수가 곳곳에서 솟아나는 걸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컵하나를 들고 다니며 따듯한 온천수로 몸을 녹였다. 방금 막 구어내 따끈따끈한, 문양이 새겨진 전통과자 Kololado와 함께.

온천수 / 콜로라도 Kololado



 그렇게 정처없이 걷던 우리는 강변에 자리잡은 3층 짜리 카페로 들어섰다. 한 자동차를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책임님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한국이 아닌 체코, 프라하가 아닌 까를로비 바리라는 이유로 우리는 어처구니 없이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간호사 언니들의 직장생활, 책임님의 15년차 체코생활, 모든 게 불투명한 우리들은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겉으로는 제 짝인지 몰랐던 조각들이 알고 보니 착ㅡ하고 들어맞는 퍼즐처럼.

까를로비 바리 Karloivivary



 그렇게 수다에 푹 빠져 낮인지, 저녁인지 관심이 없었던 우리는 10월 만큼이나 애매한 시간, 햇빛과 가로등 불빛이 5 : 5로 뒤섞일 때쯤 카페를 나섰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갑작스런 일정을 지극히 경계하던 사람이 어딘지도 모르는 도시로의 당일치기 여행을 두 팔 벌려 환영할 순 없었다. 앞을 향해 잘 걸어가던 내 손목을 누군가 낚아챈 기분이었다고 해야하나. 하지만, 어디 한 번 두고보자는 마음으로 마지못해 끌려간 길 끝엔 아름다운 도시와 좋은 사람들, 소중한 대화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계획을 지켰다는 성취감보다 더 달콤했다.
 

까를로비 바리 Karloivivary



번개, 파괴가 아닌   



 사실 이 날은 D의 생일이었다.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알게 된 사실이었다. 책임님께서는 우리를 일부러 집으로 데려가 미역국을 끓이고, 불판을 꺼내 고기를 굽고, 허니케이크에 초를 꽂아 축하 파티를 한 뒤, 온갖 디저트를 식탁 위에 꺼내놓고 차를 대접해 주셨다.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귀찮으니까, 계획에 없었으니까, 내일을 위해서 모두를 돌려보낸 뒤 쉬어도 시간이 부족할테니까. 그러니 겨우 한 달 된 인턴의 생일파티를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준비하는 책임님이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Birthday Party



 책임님은 내가 까를로비 바리에서 본 것들을 이미 보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예상치 못한 길목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원래 가려던 길따위는 생각조차 나지 않을만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만한 무언가를 마주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걸 마주쳤을 땐, 뒤돌아보지 말고 아낌없이 빠져들어야 한다는 걸. 그래서 어쩌다 보니 흐르고 있는 시간을 즐기고, 그 시간들에 함께 흘러 들어온 사람들까지 온 마음을 다해 대할 수 있는 거라고.








 요즘의 나는 급작스런 만남이 치명적이지 않은 이상 '번개'에 기꺼이 응답한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내 삶이 충분히 멋있다는 걸, 아니 그 이상으로 반짝일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당신이라는 번개가 나의 일정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늦은 밤 손을 놓지 못하는 연인과 담장 위에 잠든 새끼고양이처럼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아름다운 것들을 비춰주는 불빛이 되어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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