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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Apr 24. 2020

인생은 서둘러야 하니까

Festina를 잊지 말자 : 내가 계획을 세우는 법

'Festina'를 잊지 말 것 : 인생은 서둘러야 한다



 연재 중인 브런치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하루를 천천히(Lente) 살되, 인생은 서두르자(Festina)는 것인데, 이제까지 연재한 네 편의 글들은 Lente의 모습을 주로 다뤘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Festina Lente를 삶의 원칙으로 선택한 후 '나의 하루'가 가장 크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피부에 와닿는 변화였기 때문에 브런치를 구상하면서도 Lente를 자연히 앞쪽에 배치했다. 그러니 내가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느긋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촘촘히 짜여진 직물같은 계획들마저 작은 단도로 툭 툭 끊어놓고 다니는 악동처럼 보일 수도 있겠고.

Vancouver Public Library  / 여행 중에도 한국에서의 에디터 활동을 준비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에게 계획은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것 역시 그렇다. 하루를 천천히 즐기기만 하는 건 반쪽짜리 Festina Lente다. 'Lente' 앞에 'Festina'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생은 서둘러야 한다. 특히 원하는 목표나 방향이 뚜렷하다면 더욱 그렇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모습을 최대한 오랫동안 즐기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따라서 어떤 형태든 계획이나 로드맵 따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예전의 계획, 지금의 계획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나는 계획을 세우고 살아간다. 하지만 Festina Lente하기로 마음먹기 전과 후의 계획엔 꽤나 차이가 있다. 특히 계획을 세울 때의 마음가짐과 계획을 세우는 방법이 다르다. 그 미묘한 차이들을 나누기 위해 스무살 때부터 줄곧 써온 스케쥴러를 공유해보기로 했다. 특히 스케쥴러를 적을 때 머릿속에 멤돌았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되살리는 데 집중했다.


Yearly

2018년_Yearly Goals



Past   

 새해가 밝았다. 뜨끈뜨끈한 전기 장판에 늘어붙어 유명 인사들이 종을 치는 모습을 쓸데없이 경건하게 지켜본다. 종소리가 잦아들면 온탕에서 빠져나오듯 이불 속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미리 사둔 스케쥴러를 펴고, 올해의 목표를 하나하나 적어내려간다. 많이 적으면 결국 다 못 지킬 거 같지만, 그래도 새해인데 포부가 작으면 안 되지ㅡ라는 생각에 되는 대로 다 적어본다.

2020년_Yearly Goals



Present   



 2019년 12월 31일의 나와 2020년 1월 1일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살 더 먹는다고 게임 캐릭터 레벨업 하듯이 능력치가 아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취업은 꼭 하고 싶다. 이제 손 벌리며 살고 싶지가 않을 뿐더러 대학생 신분은 즐길만큼 즐겼다. 예전보다 추상적인 목표를 적어본다. 엄밀히 말하면 목표라기보다 다짐에 가깝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조금 덜 상처받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해본다.





Monthly
 
2016_Monthly Plan



Past   

 새해 목표를 정했으니 1월부터 12월까지 쭉 늘어뜨려놓고 반복되는 학기와 방학을 표시한다. 몇 월부터 몇 월까지는 토익 공부를 하고 이맘때쯤 토익 시험을 봐야겠다고 다짐한다. 아마 컴퓨터활용능력 시험도 봐야겠지. 취업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근데 누가 그랬더라). 이렇게 월별로 쪼개놓은 계획은 이제 막 시작한 새해가 저물어 갈 때까지 하루하루의 가이드라인이 된다.




2020_Monthly Plan



Present   

 Monthly는 패스한다. 월의 시작점에서 해도 충분한 고민들을 한 해의 시작부터 하지 않기로 한다.

 매월 1일마다 이번 달을 넘기면 미래의 나를 불편하게 할 만한 것들만 추려본다. 자기소개서를 위한 글감을 준비해둔다거나, 3월에 토익이 만료되기 전에 갱신해야 한다든가, 청년구직활동지원금을 미리 신청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이런 것들은 사실 몇 달 전부터 생각할 필요는 없다.











Weekly & Daily


2017_Weekly&Daily Plan



Past   
 
 이번 주는 매일 복습을 하면서 소논문 자료 조사를 끝내야 한다. 다음 주에도 매일 복습을 하고, 리딩에 대한 요약문도 작성해야 한다. 이틀에 한 번씩 기출문제를 하나 풀고, 그 다음날은 무조건 오답노트를 한다. To do List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뿌듯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어딘지 답답하고 막막하다. 할 일이 이렇게 많다니...일주일 중 하루만 놓쳐도 다음주 Weekly와 Daily가 넘쳐흐를 게 눈에 선하다. 위태로운 젠가처럼 보인다. 하루라도 구멍이 나면 허물어져 버릴 것 같은 젠가.

 결국 오늘 해야할 일을 끝내지 못했다. 지워나가지 못한 목록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내일 약속을 취소해야하나 싶다. 급한 일들은 아니지만 계획을 세웠으면 무조건 다 끝내는 게 맞지 않을까. 매일 세워둔 계획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몸이 아파도 멈출 수 없는 굴레가 된다. 고장이 나서 멈추지 않는 런닝머신 위를 달리는 기분이다.



Present   

 향후 2주치 계획을 간략히 세운다. 채용 공고를 확인하고 지원서를 준비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번갯불에 콩 구어먹듯 제출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벼락치기가 선천적으로 불가능한 나는 그런 식으로 자기소개서를 썼다가는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
 대신 일주일을 5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일종의 버퍼다. 뒤로 숨겨둔 이틀은 비장의 무기가 된다. 해야 할 일을 다 끝냈다면 온전히 쉬어도 되고, 할 일이 남았을 경우 그 시간들을 활용하면 된다. 고정적이진 않다. 당일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마음껏 포기하고, 마음껏 놀고, 마음껏 열심히 산다.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오로지 내 선택에 달려있다.

2020년_Weekly&Daily_사적인 정보가 많아 도서 리뷰로 대신했다



 잠들기 전에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본다. 아침에서야 하루 일정을 고민하다 보면 시간이 훅ㅡ 지나갈 때가 많기 때문이다. 더불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도 끄적여 본다. 삶에는 미래만 있는 게 아니라 현재와 과거도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을 얼마나 수행했는가'와 더불어 '오늘 무엇을 했는가','누구를 만나 무슨 생각을 했는가'를 회상하다보면 24시간이 과제로만 가득하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계획도, 기록도 아닌 스케쥴러



 'Festina Lente를 하면서 실질적인 성과를 창출해내는 데 문제가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하기 이르다. Festina Lente를 결심한지 이제 막 1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스케쥴러는 계획도, 기록도 아닌 무모함의 누적이다. 루고자 하는 바를 향해 차곡차곡 Festina 하면서도, 일상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 Lente하겠다는 게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아직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라지는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불렀어요.
요즘 말로 하면 ‘시계로 잴 수 있는 시간’을 뜻하는데 이런 시간은 지나가 버릴 뿐 돌아오지 않아요.

하지만 이들은 크로노스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을 함께 사용했어요.
카이로스는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리는 것 같은, 우리가 애타게 바라고 평생 기억하는 마법 같은 순간을 뜻하죠.

by 매슈 비어드 / <뉴필로소퍼> p.133



 매슈 비어드의 설명대로라면 Festina Lente  곧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둘다 챙기겠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놀면서 할 거 다 하겠다는 거다. 하지만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둘다 취하려는 건 지나친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시간이라는 건 한정적이라 크로노스에 몰두하면 카이로스를, 카이로스에 몰두하면 크로노스를 소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Victoria



 이 모든 무모함 속에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Festina Lente 이후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살갗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외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하루를 버텨낸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제대로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낀다. 여기서 비롯된 만족감은 To do list를 모두 지워나갔을 때보다도 훨씬 본질적인 충만함이다. 그것만으로도 Festina Lente의 무모함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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