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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Festina L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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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Jul 19. 2020

장래희망 말고, 다른 거

Festina Lente를 위한 가이드라인_버킷리스트

휘청거리더라도 매일 나아가는 삶



 잰 걸음으로 숨가쁘게 걸어가면서도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삶이 있는가 하면, 휘청휘청 거리는 주제에 자신의 신념과 목표를 향해 하루에 10cm라도 나아가는 삶이 있다. 연재중인 브런치를 관통하는 주제, 'Festina Lente'는 후자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해야겠다. 어떤 면에선 뒤쳐지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 위에서 꿋꿋이 걸어간다는 뜻이므로.


 그리고 그 '길'이라는 건 모두에게 각기 다른 형태와 이름으로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연봉처럼 수치화된 형태로, 누군가에겐 타인의 기쁨이나 정의와 같은 가치로 정의되기도 한다. 우선 '어떻게 생긴 길'을 걸어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어떻게 그 길을 걸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답을 내릴 수 있다. 내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가를 제대로 고민하기 시작한 계기는 친구 J 어머님의 말씀이었다.



장래희망말고, 다른 거 먼저



  베네치아 여행 마지막 날, 친구 J와 나는 베네치아의 명물인 먹물 파스타 정도는 먹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식당을 찾아 나섰다. 손가락으로 숱한 블로그 후기를 기웃거리는 것보다, 두 발로 골목길을 헤매는 아날로그 방식을 선호하는 우리는 한참 베네치아 길거리를 걸어다녔다. 그러다 손님 한 명 없지만, 동남아인 종업원이 티 없이 웃어보이는 식당에 얼떨결에 발을 들여놓았다.



Venice with J



 먹물파스타,해산물 튀김, 샹그리아 두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우리는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초등학교 때 종종 밝혀야만(혹은 만들어내야만) 했던 장래희망에 대한 것이었다. J가 어린시절 꿈에 대해 물어보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나는 장래희망칸에 국어선생님, 미술가 등을 적었던 기억이 난다고 답했다. 그런데 J는 자신의 과거 장래희망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어릴 적 장래희망이 너무 어려웠고 장래희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는 뚱딴지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초등학생 J는 10살도 안 된 나이에, 혹은 겨우 10살을 넘긴 나이에 앞으로 20대, 30대에 자신이 무엇이 될지 상상할 수 없었다. J에게 앞으로의 삶을 그리는 일은 유난히 불편했다. 그런 J에게 J의 어머니는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장래희망이 단순히 직업일 필요도 없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면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도 분명해질 거라고.



Venice



 J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을 때, 평생에 걸쳐 묵묵히 지어온 집에 구멍이 뚫려 물이 철철 새는 기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호우에 천장이 무너져 물이 새는 재해가 아니라, 집에 있는 지도 몰랐던 작은 구멍이 시원하게 뚫리며 내부를 가득 채웠던 고인 물이 바다로 정신없이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항상 막막했다.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열 다섯 살에도,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던 열 아홉 살에도, 제대로 고민한 뒤 선택을 내려본 적이 없었다. 그저 '나쁘지 않은 것', '겉으로 보기에 괜찮은 것'을 선택했다. 그게 편했으니까. 그렇지만 동시에 찜찜했다. 집에 무언가를 놓고 나왔는데 그게 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처럼.


 그래서 스무살이 되었을 때 직업만큼은 주먹구구식으로 선택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대학생활 동안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거 하나만 해내도 4년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거였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고민해야 하는건지 알 수 없었다. 공기업을 가야하나 사기업을 가야하나? 전공을 살릴 수 있을까? 대기업을 준비하다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수많은 물음표들이 멤돌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스스로가 삶에 대한 본질, 그 언저리에도 가 닿지 못하고 빙빙 겉돌고만 있었다는 걸.


 Venice



 그렇게 겉돌기만 하다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내쳐질 일이 두려웠던 내게, 10년도 더 지난 J어머님의 말씀은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는 물꼬를 터주었다. J어머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회사에 갈 것인가, 어떤 직무를 선택할 것인가 이전에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를 먼저 고민하는 게 맞았다. 그래야 그런 삶을 살아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직업을 보다 폭 넓게 생각해볼 수 있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만족하며 살 확률도 높일 수 있을 거였다. 과거의 내가 '베네치아에서 유명한 OO레스토랑에 가야겠어'라는 마음만 있을 뿐 거길 왜 가야하고, 무엇을 먹고 싶은지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그 일을 계기로 비로소 '현지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식당에서 먹물파스타와 샹그리아가 먹고 싶어. 그러기 위해 블로그가 아니라 직접 동네 구경을 다니며 나만의 맛집을 찾아볼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거다.



죽기 전에 꼭 이렇게 살고 싶다



 바로 그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구체적인 실체로 만들기 위해 나는 버킷리스트를 쓴다. 버킷리스트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라는 뜻이지만, 그게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내는 삶이라면, 분명 내가 살고 싶은 삶일테니까. 


 사실 버킷리스트는 매년 다이어리 앞 장에 반드시 적는 도입부였다. 그래서 J와 대화를 나누기 전에도 버킷리스트를 적는 일은 연례 행사였다. 하지만 그 일 이후 나의 버킷리스트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적히기 시작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에서 '죽기 전에 꼭 이렇게 사는 사람이 되고싶다'는 느낌으로 바뀌었다고 해야할까. 올해의 버킷리스트를 공유하면 좀 더 와닿지 않을까 싶어 적어보자면 이렇다.


 

[ 2020년 Bucket List ]

생각한 건 행동으로 옮기기

잘하는 것 하기

취업하기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하기

홀로서기

내 손으로 모임이든 뭐든 만들어보기

거절하기

특별하지 않음을 인정하기



생각한 건 행동으로 옮기기

ㄴ 생각만 많은 스타일이라 생각해놓은 것들만 실행에 옮겨도 과거보다 많은 걸 이루어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잘하는 것 하기

ㄴ 항상 부족한 걸 채우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보다 원래 잘하는 걸 더 잘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걸 이젠 안다. 


취업하기

ㄴ올해 유일하게 이룬 버킷리스트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하기

ㄴ스스로를 챙기지 못해 주변사람 손을 많이 빌린다. 그들에게 미안하니까, 이젠 내가 나를 챙길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홀로서기

ㄴ평생에 걸쳐 이루어야 할 버킷리스트


내 손으로 모임이든 뭐든 만들어보기

ㄴ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자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거절하기

ㄴ적절한 거절은 나를 위해서도, 상대방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특별하지 않음을 인정하기

ㄴ못난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덜 괴롭게 살 수 있다.




 그러니 버킷리스트는 Festina Lente의 근본적인 틀이 된다. '죽기 전에 꼭 해야할 일(things)'이 아니라 '죽기 전에 꼭 어떤 삶을 살고 싶다(How)'는 방향성, 방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잡다한 일들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버킷리스트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선택하면 된다. 그러면 상상했던 것과 다른 날들을 보낸다거나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어쨋든 나의 길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전진할 수 있게 된다. 느리더라도(Lente),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향해 매일같이 서두를 수 있는 것이다(Festina). 그러니 죽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아보고 싶은가를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온 삶을 휘청거리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테니까.





 'Festina Lente'라는 주제로 글을 연재한 지 약 6개월 만에 마지막 글을 마무리 짓는다. 돌이켜보니 처음 계획과는 많이 다른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번 나누어 연재하려던 내용들을 한 데 합치기도 했고, 한 번에 담기엔 내용이 넘쳐 부러 나누어 담기도 했다. 계획대로라면 3개월만에 마쳤어야 할 연재인데 자그마치 두 배가 넘는 기간이 걸린 것도 처음과 달라진 점이다. 후회나 아쉬움은 없다. 'Festina Lente를 주제로 브런치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고, 조금 오래 걸렸지만 결국엔 끝을 보지 않았나. 결국 버킷리스트대로 Festina Lente한 셈이다.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살아갈지 확신할 순 없다. Festina Lente가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이 필요한 시기도 언젠가 올 것이다. 다만, 고질적인 강박관념과 심각한 소화불량으로 고통받고 있을 누군가에게 Festina Lente를 소개해주고 싶었다. 최소한 나에게는 효과적인 처방이었으므로, 그래서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므로, 당신도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지난 글들을 다시 정독해보니, 독자들에게 이런 의도가 잘 전달됐을지 의문스럽긴 하다. 횡설수설 말하는 습관이 글에서까지 드러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렸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염치 없지만 그래도, 주절주절 읊어놓은 이야기들 가운데 한 줄만이라도, 누군가에겐 원래 내것인냥 꺾어다 간직하고픈 들꽃 같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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