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성공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 체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세련됨’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수십년간 이어져온 정치경제적 연구가 자본주의의 승리를 이미 잘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자본주의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세련됨에 있다고 생각했다.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노트북을 두드리며 작업을 하는 예술가, 한껏 꾸민채로 마천루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인플루언서, 햄버거와 콜라를 마시며 코드를 짜는 너드, 넥타이를 매고 숫자와 그래프를 들여다보는 증권맨, 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 파란 하늘을 쏘다니는 비행기, 아이폰, 나이키. 우리는 자본주의가 분사하는 시각적 아름다움에 이미 매혹(혹은 중독)되었기 때문에 체제의 외부를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작년 여름 일본에 갔을 때, 아름다운 시부야의 거리를 걸으며 일주일내내 공굴리던 생각이기도 했다.
과연 일본처럼 사랑받는 국가가 있는가? 대중문화, 예술, 패션, 라이프스타일, 출판, 잡지, 식문화 등 분명 일본의 문화는 전세계적으로 사랑 받는다. 일본은 산업화를 가장 성공적으로 이룩한 몇 안되는 국가로서, 미국 전체를 갖다받쳐도 도쿄를 팔지 않겠다고 선언할 만큼 경제적 문화적 성취에 대한 자신만만함을 드러냈던 국가로서, 그 획득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흘러넘치는 풍요 위에서 세련되고 아름다운 고도의 문화적 취향을 쌓아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는 오카쿠라 텐신이 『동양의 이상』에서 보인 일본 문화에 대한 자신감, 즉 인류의 문화적 진보가 비로소 일본에서 만개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일본이 미래의 문화제국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와 정치적 폐쇄성, 산재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는 일본에 과연 희망과 미래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분명 전세계적으로 일본만큼이나 사랑 받는 국가는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일본은 강한 것이 아닌가.
경제력이 한 국가의 하드파워를 의미한다면 문화력은 소프트파워를 의미한다. 세련됨은 미국이 세계를 호령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중국은 경제력과 군사력 차원에서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중국을 미국만큼이나 매력적인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추후 중국이 미국을 완전히 따돌리고 압도적인 지위의 최강대국이 된다고 해도, 지난날 미국이 보여줬던 만큼의 영향력를 행사할 수 있는지 여전히 미지수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며 이민자에 대한 차별 혹은 제한이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은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은 국가 차원에서 자신들의 매력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대신 할리우드와 빌보드, 실리콘밸리에서 분출되는 창조의 에너지가 전세계인을 사로 잡는다. 미래를 선도하고 싶은 국가는 강한 하드파워 뿐만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 치명적인 소프트파워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환경문제든 계급문제든 다양한 분야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더 나아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조직의 일원이 되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주 얕게, 그리고 아주 짧게 경험한 그곳에는 조금 참기 힘든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세련됨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절절한 진심이야 두말하면 아플 것이고, 그렇기에 그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절절한 그들에 비해서 나는 세속적인 세련됨에 관심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감수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을 설득하려면 새로운 방식이 필요해보였다. 적어도 나는 그들의 방식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메시지보다 메신저에 주목할 때가 더욱 많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누구로부터 발화되는가에 따라 사람들의 진심에 가닿는 질과 양은 천지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