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21세기 들어 대두한 오타쿠 문제를 통해 무기력한 삶이 증가하는 일본사회에 대해 서술한다. 저자 아즈마 히로키는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동물로의 회귀’ 개념을 빌려와 오타쿠 문제로부터 일본인의 ‘동물화’ 징후를 읽어낸다.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헤겔이 역설했던 ‘역사의 종언’, 즉 나폴레옹이 예나를 침공하기 전날 탈고된 『정신현상학』에서 이야기 한 근대사회의 탄생 이후에는 인류에게 두가지 생존양식 밖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하나는 전후 미국형 소비사회의 발달에 따른 동물로의 회귀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적인 스노비즘이다. 시기상 코제브가 해당 문제를 지적한 시점이 훨씬 이전이긴 하나, 후기 자본주의가 무르익는 시절로 이행하며 코제브가 지적한 동물로의 회귀 문제는 더욱 두드러진다. 포스트 모던한 사회에서 거대한 이야기, 즉 이데올로기가 조락하자, 정보화된 소비사회의 인간들은 적절히 관리되는 미디어를 통해 대부분의 본능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시작한다. 이데올로기가 제거된 세상의 오타쿠들은 미디어 속의 단편적이고 사소한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시간을 떼우고 욕구를 해결한다. 일상적인 식사는 패스트 푸드로, 성적인 관계 맺음은 포르노 산업으로 간편하게 해소하는 동물화된 인간들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력(無力)한 존재들이 급진적인 사상에 경도되어 무력(武力)에 헌신하는 존재로 비화하는 순간에 대한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전체주의를 분석하며 그것이 발생하는 원인으로 지목 한 것도 무력(無力)한 대중의 존재다. 대중들은 점차 의미를 잃어가는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급진직인 사상에 쉽게 휩쓸리게 되고, 급진적인 사상들은 역사적으로 대부분 무력(武力)을 동반해왔다. 일전에 쓴 <자유와 반동>에서 언급했던 『분노의 시대』가 해당 지점, 그러니까 우리 시대의 낙오자들, 특히 비서구권의 민중들이 왜 주류 질서에 분노를 느끼고 어떻게 그에 반동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꼭 한번은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인데, 해당 책은 『분노의 시대』와는 다른 차원에서 분노와 반동의 시대에 대해 파악하기 적절한 책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에 따르면 국가의 붕괴는 네가지 사유를 따르는데, 그것은 대중의 궁핍화, 엘리트 과잉생산, 쇠약한 재정 건전성과 국가의 정당성 약화, 지정학적 요인이다. 이 중에서 저자 피터 터친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바로 엘리트 과잉생산이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과잉생산된 엘리트들이 가하는 내부 압력에 의해서 무너졌다. 사회의 성장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인구의 수가 증가함과 더불어 엘리트의 수가 점증한다. 하지만 이는 곧 자산과 적당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하위 엘리트도 함께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은 불만에 가득차서 체제의 한계로 인해 점차 가난해지는 대중의 불만을 동원해 사회와 상층 엘리트에 대한 투쟁에 나선다. 피터 터친이 주된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미국과 유럽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러한 추세는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과정이 언제나 분쟁과 갈등, 엘리트들의 물리적인 제거와 함께 이뤄져왔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 유럽의 수많은 왕조들도 해당과 같은 과정을 거치며 스러졌고, 미국의 경우 플랜테이션과 노예제에 기반한 전통 남부 귀족과 제조업과 금융에 기반한 북부의 신흥 자산가들 간의 내전이 일어났던 남북 전쟁을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피터 터친은 트럼프 정부의 등장도 이러한 역사적 주기 위에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실제로 트럼프 지지자들에 의한 의회 점거 난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우리가 발딛고 선 현시대도 피터 터친이 밝힌 역사적 주기와 무관하지 않으며, 곧 있으면 모두가 폭력이 난무하는 재앙의 시대로 끌려들어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1945년 이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진행된 일련의 정치적 변화를 경험하며, 인류의 번영에 대한 자신감이 샘솟던 시기를 생각하면 오늘날의 풍경에 격세지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공산주의의 위협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때는 분명 인류가 환희에 차있었다. 2차 대전을 거치며 파시즘 세력이 사라졌고, 전후 활황과 기술 발전, 이와 더불어 케인스주의 경제 운용에 따른 공공 지출의 확대로 세계 경제는 호황을 맞이했다. 많은 국가들이 선망했던 “무덤에서 요람까지” 기능하는 복지국가도 이러한 배경 위에서 가능했고, 상호이익과 호혜에 바탕한 공동체도 정상 작동하고 있었다.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노동자와 기업 그리고 국가는 모두 이익을 누렸고, 오늘날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진보적 가치의 맹아도 이 시기에 배아되었다. 물론 제3세계의 경우 19세기에 획책된 식민지 경제의 착취 구조와 더불어 서구 정부의 필요에 이바지 한 수입대체 경제모델의 한계로 저개발에 묶여 서구의 번영을 쫓아가는 것에 실패했지만, 어찌되었든 1989년에 소련의 붕괴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역사의 종언’을 선언할 만큼 인류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자 이전과 같은 호황기는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매우 특수한 환경 속에서나 기능한 것임이 밝혀졌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생산성 향상의 저하로 인해 서구는 악몽과 같은 스태그플레이션을 맞이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일군의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로 재편되며 전후 호황과 그에 따른 사회계약들은 빠르게 잊혀졌다. 비교우위 원리에 따라 전개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그것을 찬양했던(그리고 생산 시설의 해외 이전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던) 경제 엘리트들의 약속과 달리 블루칼라 계급의 삶을 한층 더 퇴락시켰고, 세계화의 수혜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이들은 분노에 치를 떨며 거리를 헤매고 있다. 트럼프는 이러한 배경 위에서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어 두번이나 손쉽게 정권을 탈환했다.
미국이 제공했던 안보 보장을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빠르게 쇠락하고 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미국식 질서에 반감을 가진 이들은 이 사태를 환영할 것이나, 어찌되었건 미국이 자유진영의 선도자를 포기하는 과정과 중국과 러시아를 위시한 비자유주의 세력의 부상에 따른 문명권 간의 갈등은 세계를 급격히 격랑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미중 갈등을 시작으로, 최근 들어 불거진 이란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분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관세 인상 압박과 동맹국을 향한 국방비 부담의 전가는 미국이 지위 상실을 극복코자 분투하는 과정에서 심대한 갈등과 난항이 빚어질 것을 예감케 한다. 미국이 전세계에 배치했던 군사력 덕분에 일본과 독일은 군방비 지출을 줄이고 경제성장과 국내 평화를 진작하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 미국이 생존을 위해 고립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하자 유럽은 국방비를 증액하기 위한 논의를 일제히 시작했다.
미국은 몰락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난 세기 미국은 기축통화의 발행과 세계화를 주도하는 국가로서 막대한 이익과 번영을 누려왔다. 미국 정부가 연준에서 찍어낸 달러를 국채를 팔아 사들여 중국으로 흘려보내고, 중국은 미국이 투자한 공장에서 저렴한 공산품을 생산해 세계에 공급하며 달러를 벌어 석유를 사고, 사우디는 중국에게 석유를 팔아 번 달러를 다시 미 재무부가 발행한 국채에 투자하는, 달러가 세계를 돌고 돌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페트로 달러 시스템 위에서 전례 없는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은 쌍둥이 적자, 즉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한편 세계의 공장으로서 생산기지 역할을 도맡으며 실력을 키운 중국에 의해 미국은 제조업 역량을 상실했고(물론 미국이 자초한 일이다), 거듭 언급하지만, 트럼프 정권 탄생의 배경이 된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일자리 감소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위에서 벌어진 일이다. 중국의 추격이 턱 밑까지 당도한 미국은 ‘Great Again’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은 자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담지했던 가치외교와 자유주의의 선도자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평화의 시대를 지나 재앙의 시대에 진입해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서구에서 발흥한 인권과 평등, 자유와 정의와 같은 가치(해당 가치들이 전적으로 서구에서만 발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여러 차원에서 제기되어 왔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미국이라는 스탠다드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나 가능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짧은 호황기에 취해 있는 사이 근대화와 자유화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의 맹아는 외면 당하고 있었고, 결국 재난 영화에서나 묘사되던 아포칼립스적인 세계가 죽은 사체를 뜯어먹기 위해 서성이는 맹금류처럼 문턱 앞에서 우리를 노려보는 상황과 마주하게 됐다.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진보 정치의 쇠퇴도 이러한 흐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보 정치의 퇴화를 설명하는 여러 언어가 있을 것이다. 해당 세력이 더 이상 매력적인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고, 정무적인 판단에 있어서 여러 패착을 거듭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심층적인 원인은 상술한 시대적 변화에 따른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대중들은 근대화가 자극한 공동체의 붕괴에 따라 무주공산 속에서 방향을 잃고 골방에 틀어 박히거나,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고양시켜줄 급진적인 사상을 찾아 헤매왔다. 재앙의 시대가 본격화 될수록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더 나아가 급속하게 악화되는 기후와 생물다양성은 재앙으로의 진입을 한층 가속화하는데, 예측 불가능한 재앙을 막기 위해 과학자들이 전세계인들을 대상으로 읍소했던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의 억제는 이미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쇠퇴, 격차의 심화, 기후의 격랑은 물론 문제가 많았지만 “나름대로 평화롭고 번영하던 세계”를 역사책 속에나 존재하던 과거로 떠밀고 있다. 이렇게 개인과 공동체가 점차 생존에만 몰두하게 되는 상황에서는 진보 정치가 힘을 쓰기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이번 대선에서 1%의 득표도 올리지 못한 것이 일정 부분 드러냈듯이, 제도권 내부의 정치 세력으로서 진보는 거의 수명이 다했다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진보 세력이 정체성의 밑바탕으로 삼았던 계급이해와 사회정의에 대한 대중의 감각이 “나름대로 평화롭고 번영하던 세계”에서 통용되던 것과는 매우 달라지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의 노동자 계층은 자신들의 계급 이해를 지켜줄 힘이 좌파가 아니라 극우에게 있다고 보고 있고, 진보 세력이 추구했던 가치가 대중들에게 엘리트들의 한낮 말잔치로만 비춰지고 있다. 그렇다면 진보 정치가 생존할 길은 제도권 밖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글로 정리하게 된 건 한편의 영화 때문인데, 그 영화는 바로 <어느 가족>이다. 언뜻 영화는 정상가족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에 부합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감독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화가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묻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 정확히는 다가오는 재앙의 시대가 생산해낼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많은 이들이 해당 영화의 절정으로 추켜세우는 취조실 장면에서 여주인공 노부요가 흘리던 눈물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앞으로 <어느 가족>에서 묘사된 형태의 공동체는 걷잡을 수 없이 증식 할 것이고, 그들의 무기력과 폭력이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될 공산이 굉장히 크다. 그리고 그럴수록 우리가 오래도록 방치하고 있던 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물음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진보 정치가 살아남으려면, 제도권 밖으로 뛰쳐나가 공동체의 역할을 다시 묻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진보 세력 내에서 공동체의 미덕을 묻는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진보 정치의 주된 흐름은 개인의 권리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이뤄진 측면이 크다. 그런 맥락에서 정체성 정치에 몰입했던 진보 정치의 과거에 대해서 진지한 반성이 필요하다. 저학력 계층의 경제 여건은 세계 곳곳에서 거의 동시에 악화되고 있고, 이는 그들의 삶과 공동체를 지탱하는 사회적 제도와 안정의 상실을 의미한다. 근래 한국 청년들이 겪는 치명적인 취업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과잉생산된 엘리트들의 문제도 점차 고조되고 있다. 근대화와 자유화 자체가 공동체와 사회적 포용의 쇠퇴를 불러옴도 아울러 주목해야 한다. 반복적으로 언급하지만,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은 이들이 무기력하게 거리를 배회하거나 분노에 가득차 총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나가게 될 미래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무기력이 폭력으로 비화하는 순간에 개입해 그들의 분노를 순치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안녕을 묻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야만 진보 정치는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