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안다는 것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by 코두 codu

세계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내적 세계와 일치하지 않는 세계 앞에서 내면의 공고한 세계를 부수고 새로 정립하며 나아간다. 이런 이들을 우리는 철학자, 과학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는 중세시대 지동설을 둘러싼 대립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동명의 만화책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일정한 시기를 두고 3부로 나뉜다. 교회의 이단자로부터 ‘지동설’을 접하게 된 후, 촉망받는 미래가 아닌 죽음을 택한 총명한 소년 라파우. 그의 기록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지동설을 완성하고 발표하고자 하는 바데니 신부와 천국에 갈 수 있을지 불안해하는 눈 밝은 사형 집행인 오크지 그리고 천문학을 사랑하는 소녀 욜렌타. 오크지가 남긴 기록에서 돈냄새를 맡은 유랑 민족의 드라카와 교회 정통파와 맞서는 이단해방전선의 전사들. 지동설이 기록과 만남들로 몇몇의 사람들을 지나치는 동안 용병 출신 이단 심문관 노바크는 흔들림 없이 이들을 쫓고 죽인다. 노바크의 기준은 확고하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흔들림 없이 타인을 심판한다. 그러나 어린 라파우의 선택에 놀라고 바데니와 오크지의 결심을 보며 노바크는 의문을 가진다. ‘왜 이렇게까지 할까?’ 지동설 그까짓 게 뭐라고. 이들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세상의 진실에 한 발 가까워진다는 것만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과 감동 그리고 경이가 있다. 이 감각은 신앙과도 가깝다. 인간보다 거대한 무언가를 인지하고 그 거대한 무언가와 연결되었다는 느낌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도의 감각 중 하나다. 신앙도 과학도 철학도 모든 앎은 곧 거대한 세계와의 연결로 이어진다. 그 감각을 느껴본 사람은 다시는 그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의 세상,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언뜻 보기에 우리 옆의 사람들은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15세기 중세시대에, 어떤 사람은 1960년대에, 어떤 사람은 2050년대에 살고 있다. 세계를 어떠한 관점으로 어떤 신념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다른 시대를 사는 것이다.

<지-지구의 운동에 대하여>가 거시세계에서 사고의 전환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미시세계에서 거대한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분야는 양자역학일 것이다. 앞서 소개한 애니메이션의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양자역학은 ‘입자의 운동에 대하여’라고 말할 수 있다. 카를로 로벨리는 저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통해 양자역학을 쉽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상호작용 없이는 속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현상들은 우연한 사건의 연속일 뿐이며 견고하고 절대적인 세계란 것은 없다. 이 책 한 권으로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무리다. 다만 카를로 로벨리가 양자역학을 통해 깨닫게 된 세상의 아름다움을 잠시 엿볼 수는 있다. 고전 물리학과 비교해 양자역학의 세상은 불연속적이고 불확실하다. 다만 모든 것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실재한다. 고정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궁극적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관계의 세상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


로벨리는 외부의 객관적인 시선은 없다고 말한다. 모든 관찰은 결국 ‘1인칭’ 일뿐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편견과 경계 속에 살고 있다. 지구 밖에는 더 큰 우주가 있고, 천국과 지옥으로만 이루어진 삶만 있는 것도 아니며, 시간과 공간조차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세상은 넓고, 자유로우며, 혼란하다. 이것을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사람과 무질서로 여기는 사람의 세계는 다르며 이들은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나 역시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말해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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