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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두 codu Mar 20. 2021

사랑의 마지막 모습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AMOUR(아무르)>



AMOUR 아무르


음악가 출신의 부부 조르주와 안느는 평화롭고 우아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은 머리가 하얗게 새었어도 서로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보내는 금슬 좋은 부부다. 제자의 공연을 보고 온 다음 날 아침, 안느는 식사를 하던 중 고장 난 인형처럼 멈춰버린다. 심각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수술을 받지만, 간단한 경동맥 수술에 실패해 반신불수가 된다. 조르주는 그런 안느를 최선을 다해 보살핀다. 하지만 안느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문을 부수고 들어온 소방관들은 집에서 진동하는 악취에 코를 막는다. 시체가 부패하는 죽음의 냄새는 필멸의 존재인 우리에게 언제나 불쾌할 수밖에 없다. 지독한 악취와 대조적으로 곱게 누워있는 늙은 여성의 시체 다음에 영화의 제목 'AMOUR(사랑)'가 조용히 떠오른다. 첫 시퀀스에서 감독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인생은 아름답고 유려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독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는 것, 삶도 사랑도 죽음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조금 불편하겠지만 똑바로 담담하게 담아보겠다는 감독의 태도가 엿보인다.



태엽이 전부 돌아가버린 인형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던 것이 시작이었다. 안느의 마비는 오른쪽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걷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용변을 해결하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안느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조차 타인의 손을 빌려야만 한다.


몸이 잠깐 멈추는 것, 의식이 잠깐 사라진다는 것은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다. 의식과 육체의 정지가 반복되다 이내 완전히 멈추어 버리면 그것이 죽음이다. 안느는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갈수록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고, 가장 사랑하는 이를 힘들게 해야 하는 상황에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조르주는 그런 안느를 어떻게든 살려두고자 하지만 이 역시 힘겨운 상황이다. 조르주가 안느와 한 마지막 약속은 절대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는 것이다. 조르주는 이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안느도 조르주도 이 힘겨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라지만 여기서 안느가 건강하게 살아나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영화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앞으로 겪게 될 어떤 장면들을 미리 마주하게 된다. 나이 듦과 병듦 그리고 죽음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과제이지만 절대 풀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해결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태도의 문제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을 담는 그릇, 집




부부는 음악가지만 영화에서 음악의 사용은 절제되어 있다. 안느의 제자가 치는 피아노 연주와 CD에서 나오는 음악이 전부다. 고요함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이를테면 극 초반에 안느의 이상을 느낀 조르주가 안방으로 들어갔을 때 신경 쓰일 정도로 크게 들리던 싱크대의 물소리 같은 것이다. 카메라는 안방에서 조르주를 비추고 있지만 주방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한 화면에 있지 않아도 두 사람과 집안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극 초반에 제자 알렉상드르의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신을 제외하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집을 벗어나지 않는다. 카메라는 집 안에서 두 사람을 담고 있다가 누군가 외출을 나서면 이후 외출에서 돌아오는 인물로 바로 이어진다. 병원을 갔다 온 안느와 장례식에 다녀온 조르주를 카메라는 집에서 함께 맞이한다. 조르주가 문 밖으로 나가는 장면조차 꿈으로만 그려진다.


조르주는 안느에게 죽음을 고하고, 그제야 부부는 함께 집을 나선다. 그들이 두고 온 안느의 차가운 육신만이 집이라는 관 속에 고이 남겨져 있다. 집에는 이들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사랑과 추억, 고통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조르주와 안느의 삶과 사랑과 죽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어디까지가 사랑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이 꺼져갈 때 우리는 무얼 할 수 있을까. 편하게 해주어야 할지 고통스러운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 옳은지 혼란스러워진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쉽게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어떤 선택이든 자신의 욕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카메라는 인물과 감정을 깊숙이 파고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서 담담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저 지켜보는 영화의 관음적인 속성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느의 고통과 시들어 가는 모습은 현실적이며


조르주가 내린 결정은 사랑과 책임감을 결과이지만 그럼에도 폭력적이다. 사랑하기에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남자와 자신과 남편의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여자의 마지막은 결국 그런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이지만, 선뜻 비난할 수는 없다.


안느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 실제로 그것을 원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살고자 하는 힘없는 버둥거림만 보였을 뿐이다. 영화는 마지막 조르주의 결단에 동의할 수 있게끔 그의 입장을 충분히 말해주었다. 그에게 느껴지는 연민은 우리의 미래에 건네는 자기변명과도 같다. 우리는 조르주와 안나 둘 중 누구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일련의 과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에 놓인다. 카메라가 인물들에게 갖는 거리감은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는 모든 것을 관객에게 남겨두고 등장인물들을 함께 퇴장시킨다. 부모님이 떠난 집에서 검은 옷차림으로 홀로 앉아 있는 딸 에바는 조르주와 안나의 삶과 사랑의 결실이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남겨진 존재이다. 우리는 텅 빈 집에 홀로 앉아있는 에바처럼 적막함을 느끼며 두 사람을 생각한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하고,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그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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