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영화들
2022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저 행성들의 움직임 중 하나일 뿐인데, 한 해의 지나감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 특별함은 끝과 시작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멈춤과 환기가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에서, 반복되는 행성의 회전에서 특별함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멈춰야 비로소 이어져 온 시간을 가늠할 수 있게 되니 말이다. 약 2시간 분량으로 삶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압축해 놓은 영화를 보며 나는 수많은 끝과 시작을 경험한다. 어떤 영화의 끝도 절단된 단면처럼 끊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또 이어진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우리의 2022년도 그냥 끝난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이어진다. 내년으로 이어져 갈 올해의 흔적을 영화들로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1월의 영화는 단연코 <드라이브 마이 카>였다. 연극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하나의 심리치료 같은 영화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이라는 텍스트와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라는 텍스트 그리고 영화 본연의 텍스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저마다 고통을 지닌 다양한 이야기들이 결국 희망으로 다다르는 과정과 고요하고 부드러운 차의 움직임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었다.
미사키를 연기한 미우라 토코의 건조한 얼굴과 말투가 조용히 내린 눈처럼 평온했다. 이유나를 연기한 박유림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특히 오디션 보는 장면과 야외 연습을 하며 재니스와 합을 맞추는 장면은 몇 번을 봐도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이 영화는 기예르모 감독만이 할 수 있는 ‘괴물 쇼’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살인을 저지르고 무엇도 가지지 못한 남자가 서커스단에서 일하며 얻게 된 기술은 바로 ‘독심술’이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착각. 심지어는 상대를 속일 수 있다는 확신은 스탠턴(브래들리 쿠퍼)을 하늘 높이 끌어올리고 그 손을 놓아버린다. 감독은 오만한 남자의 성공과 추락을 화려하게, 음습하게, 강렬하게 보여준다.
어떤 불행은 값싼 즐거움이 되고, 어떤 불행은 값비싼 교환가치를 지니게 된다. 거짓으로 불행을 치유할 수는 없고 죄는 돌아온다는 서늘한 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무엇을 ‘엿본다’는 행위는 어떤 정념이 깃들기 마련이다. 남편을 죽인 용의자 서래(탕웨이)를 감시하는 형사 해준(박해일)의 마음속에는 의심보다 관심이, 정의보다 애정이 앞서게 된다. 이 의문스럽고 애매한 사랑 이야기를 앞에 두고 오래 곱씹지 않기는 힘들다. 미결에 그친 이들의 사랑 혹은 붕괴는 멜로 그 이상의 깊이로 파고든다.
역시 박찬욱은 박찬욱이었고, 탕웨이는 탕웨이였다. 오랜만에 본 아름다운 한국영화였다. 그저 눈의 즐거움을 위해 보는 것도 좋다.
이번 여름은 <헤어질 결심>과 <놉>으로 기억될 것 같다. 영화는 스펙터클 그 자체를 담고 있으면서도 그 스펙터클에 반대한다. 현대인들에게는 무엇을 보기보다 보지 않고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할리우드에서 말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OJ(다니엘 칼루야)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말을 집어삼키는 것을 목격한다. UFO 혹은 괴생명체라고 부를만한 이것은 자신을 ‘보는’ 무엇이든 집어삼킨다. 동생 에메랄드(키키 팰머)와 엔젤(브랜든 페레아)는 이것을 찍어서 돈을 벌어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한편 어린 시절 유명 TV쇼 ‘고디가 왔다’에 출연했던 주프 역시 이 괴생명체를 통해 돈을 벌려한다. 앞서 <나이트메어 앨리>에서 구경거리로 전락한 기인들처럼 <놉>의 침팬지 고디, 괴생명체는 인간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누구나 구경거리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조던 필 감독은 구경거리들의 분노를 호러 영화로 풀어낸다. 무엇이든 보고 찍는 것이 당연한 세상. 우리는 더 많은 스펙터클을 갈구하게 될 것이며 그것들이 우리를 좀먹을지라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제이크(콜린 파렐) 가족이 중고로 구입한 안드로이드 양(저스틴 H. 민)은 갑작스레 작동을 멈춘다. 제이크는 양의 수리를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양의 몸에 ‘기억장치’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양은 매일 1~2초간 어떤 순간들을 저장했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연구자들도 모른다. 제이크와 가족들은 양의 기억을 하나하나 보게 된다. 양의 기억장치를 엿보는 시퀀스는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다. 평범한 가족들의 모습, 햇살과 그림자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같은 것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양의 영혼(이라 부를 수 있다면)에 이입하게 만든다. 영화는 양의 시각에서 진행되는 듯하다. 카메라의 시각은 양의 그것과 분리할 수 없다.
누군가의 흔적을 차근히 밟아가는 영화 <애프터 양>은 과거이면서 현재인 지금 이 순간을 저장하고 또 이별하며 여운을 쌓아간다.
따뜻한 가을 무렵, 친구 같은 영화를 만났다. 실제로 오래된 친구와 함께 봐서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정희(김주아)를 닮았고, 어느 정도는 민영(윤아정)이를 닮았다. 천방지축 엉뚱하게 놀아도 한없이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민영이는 대학생이 되고, 수잔나(손다현)는 유학을 가고, 정희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서로의 길로 갈라선다. 삼행시 클럽의 일원들은 그렇게 멀어진다.
정희를 초대한 민영이는 자신의 기말성적 정정으로 정희를 내버려 둔다. 여유와 낙관을 타고난 친구들이 있다. 정희는 그런 아이다. 애써 찾아간 친구와 무엇도 제대로 함께하지 못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정희는 민영이의 집에서 홀로 민영이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민영이에게 자기만의 성적을 매긴다.
웃음이 나면서도 아련해지고, 조금은 씁쓸한 그런 시절을 위트 있게 담은 영화.
아마 올해의 영화가 아닐까 싶다.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가장 잘 녹여낸 영화라고 생각한다. <에.에.올>은 미국에 이민 와 세탁소를 운영하던 에블린(양자경)이 무한한 다중우주를 구하는 영웅이 되는 이야기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모녀가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무한한 생의 갈림길과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불교적 세계관의 현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뭐가 어찌 됐든 재밌고 감동적이다.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에 맞서는 현재의 다정함은 어쩌면 모든 우주보다 강한다. 사랑과 다정함이 모든 것을 이기는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여기’, ‘우리’의 중요성을 말하는 영화는 많지만 그것이 무한한 다중우주까지의 스케일로 커지니 그 깊이는 묵직하게 와닿는다.
<에.에.올>과는 또 다른 모녀의 이야기.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두 여성, 수경(양말복)과 이정(임지호)은 너무나 가깝기에 너무나 먼 사이다. 마트에서 싸운 후 수경이 탄 차가 이정을 들이받는다. 차의 급발진인지 수경의 고의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정은 고의라고 확신한다. 수경은 자유롭게 살고 싶다. 이정은 사과를 받고 싶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발목이 묶인 채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이정은 두 사람이 같이 입는 속옷을 빨고 있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속옷을 구입한다. 마침내 자유의 첫 숨을 내쉬게 되는 독립의 지난한 과정을 적나라하고 지독하게 보여준다. 어둠으로 가득했던 장면을 지나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독립을 이루게 되는 과정은 출산의 과정과도 같다.
극장에 가기보다는 플랫폼을 통해 더 많은 영화를 접하고 있지만 여전히 극장에서 본 영화의 힘은 남다르다. 극장에서 볼 영화가 없다는 말은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고, 좋은 영화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방에서 조금만 걸어 나와 극장으로 향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는 내년이 되기를 (나 자신에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