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1998)
객관적인 판단이 무의미한 영화가 있다. 만듦새나 완성도가 뛰어난 것도 아닌데, 캐릭터의 매력이 엄청난 것도 아닌데, 플롯에 개연성도 없는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를 장악해 버리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는 자석처럼 나의 마음을, 삶을 끌어당긴다. 이런 현상을 생각해 보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나의 무의식 속 어떤 것을 건드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영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신분석과도 같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또렷하게 알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었다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거다. 다만 이 영화와 나의 연결고리에 나의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글을 써내려 가본다. 이건 마치 보물지도를 가지고 길을 나서는 탐험가의 여정과 같다. 나 혹은 내 삶의 어딘가에 영화가 좌표를 찍고 기다리고 있다. 그곳을 찾아갈지 말지, 어떻게 찾아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일 테다.
모두에게 그런 영화가 하나쯤 있을 것이다. 세간에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나는 유독 좋아하는 영화. 그런 작품은 나의 중요한 부분과 연결되는 단서다. 지금껏 외면하고 있던 두려움이나 상처, 욕망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한번 그곳을 향해 나아가 보자. 이 영화는 왜 이리 감동적인지, 울게 되는지, 마음이 아픈지.
나에게는 감정적으로 힘들어질 때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느껴질 때, 삶이 너무 버겁게 느껴질 때, 살아야 할 이유를 잃은 것만 같을 때. 이때 느껴지는 공허함과 무기력의 감정은 이 영화로 이어진다. 그것은 나에게 축복이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나의 공허함에 반환점이 되어주는 작품이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배에서 태어나 한 번도 내리지 않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버지니아 호’에서 1900년에 레몬 상자에 버려진 아이, 그 아이는 배의 일꾼 데니에게 인도되었고 그 이름도 화려한 ‘데니 부드맨 TD레몬 나인틴 헌드레드’(팀 로스)가 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경계에서 태어나 어떤 기록도 가지지 못한 존재하지 않는 존재. 주변에 그를 아는 사람이 모두 기억을 잃으면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는 존재. 그렇게 아무도 아닌 ‘나인틴 헌드레드’는 데니가 죽던 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피아노와 음악으로 세상을 읽었고, 표현하고, 소통했다. 그 천부적인 재능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영화는 버지니아 호에서 5년 동안 트럼펫 연주자로 일했던 맥스(프루이트 테일러 빈스)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는 나인틴 헌드레드가 육지로 나가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다. 정확히 말하면 답답함을 느꼈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며 답답함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나인틴 헌드레드를 이해했다. 세상에 나가기를 두려워한 나인틴 헌드레드처럼 나 역시 세상에 나가기가 언제나 두려웠다. 나의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일은 나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학교라는 요람 안에서 평생 있을 줄 알었던 나에게 사회는 너무나 크고 무한한 공간이었다. 16년이라는 시간 동안 안주했던 학교라는 공간에서 쫓겨나기 직전의 시기에 나는 너무 두려웠다. 그 두려움과 이 영화는 공명했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나였다. “세상이 너무 무한해서 나갈 수가 없”다는 말은 결국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무한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작은 마음이 그를, 그리고 나를 가두고 있었다. 배 안에서는 나인틴 헌드레드라는 이름과 피아노로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있었지만, 육지에서 그는 존재할 수 없고, 이름도 가치도 없다. 그가 맞닥뜨려야 하는 세상의 무한함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무아’의 상태다. 자신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피아노와 버지니아호 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나인틴 헌드레드는 배를 떠날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 느껴진 감정은 먹먹함 그리고 희망이었다. 고집스럽게 배 안에서 마무리되는 그의 여정을 보고 어떻게 희망을 느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 스스로 그런 삶에 대한 두려움을 받아들인 것에서 온 희망이 아닐까. 이런 삶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만으로 희망을 얻었던 걸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이 많아져서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던 것일까.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고 느끼는 우월감과는 다르다. 그 삶은 충분히 아름다웠고, 대단했다. 사회적으로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했고 자신을 뛰어넘지도 못한 결말은 나의 생각보다 비참하지 않았다. 어떤 삶도 자신이 이끌어가는 한 비참하지 않다. 그 삶을 비참하다 말하는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이 많은 것뿐이다.
영원히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 나는 그 마음을 알고 있다. 내가 선택할 수도 있었을 어떤 삶이 그 영화 안에 있었다. 세상에 나가기 두려워하는 ‘나’를 버지니아 호에 남겨두고 영화가 끝난 자리에 돌아온 나는 현실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현실의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두려움에 떠는 나약한 인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용기를 얻었다. 적어도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두려워하는 모습이 마치 나인틴 헌드레드 같았구나.
이 영화를 보고 뭔가를 해야겠다고, 하고 싶다고 강렬하게 느꼈다. 그 고집스러움이,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하려는 점이 나와 너무 닮아서 오히려 격려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그 이후로 나는 영화에 기대어 내 얘기를 조금씩 하고 있다. 그냥 나를 말하기에 아직 용기가 없어서, 정리가 안돼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지금도 여전히 영화의 힘을 빌려서 나를 쓰고 있다.
여전히 문득 이 영화가 떠오를 때가 있는데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두려움을 마주할 때다. 그리고 이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그래도 용기를 내보게 된다. 인생의 한 지점, 감정의 귀퉁이에 붙은 영화는 인생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어쩌면 평생의 힘이 될 영화를 한 편 얻은 것이다.
어떤 영화든 나와 만나게 되는 적절한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과 감정이 맞아떨어진다면 인생을 몇 번쯤 일으켜줄 힘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이건 비단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니고, 책 혹은 음악도 마찬가지다. 힘들 때 자신을 일으켜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삶은 맨발로 걸어가던 인생의 여정에 여분의 신발을 얻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내 두 발로 걸어가야 하는 것은 변함없지만, 나를 지켜주고 일으켜줄 도구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작품은 뛰어난 명작이 아니어도 된다. 중요한 것은 나와 얼마나 연결되어 공명하냐는 것이다.
나의 안전지대에서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
나의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
에니어그램 9번 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