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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두 codu Nov 14. 2022

못 자란 어른의 자유로운 첫 숨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2) 리뷰

해당 리뷰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수경(양말복) 이정(임지호) 멀어지지 못해서 서로를 갉아먹는 사이다. 여느 때처럼 다툰  사람에게 일어난 사고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이정을 차로 쳐버린 수경은 급발진을 주장하지만, 이정은 수경이 자신을 고의로 쳤다고 생각한다.  모녀 사이에 이어져  충돌과 갈등은 곪디 곪은 고름처럼 터져 나온다. 서로에게 갈구하는 마음과 이해의 차이는 극과 극으로 서로를 밀어낸다. 극단으로 치달아가던 긴장감이 태초의 어둠을 만나 풀어지며 관계는 마침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모녀관계의 내밀함 끈적함 불쾌함


수경과 이정. 이 두 사람은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차를 몰며 심지어 같은 속옷을 입는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밀착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관계는 모녀이다. 39kg의 몸으로 4.36kg의 이정을 낳은 수경의 배에는 탄생의 징표가 여실히 자리하고 있다. 수경에게는 이정과의 관계가 모녀도, 창조주와 피조물도 아닌 숙주와 기생충의 관계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며 자란 이정에게 수경은 무심함과 폭력으로 그 값을 대신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해 버리려 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배설을 보여주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정이 화장실에서 속옷을 빨고 있는 첫 장면부터 두 사람의 소변, 생리혈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수경이 일하는 곳은 쑥좌훈방 하는 곳으로 사람들의 땀이 배설되는 곳이다. 사람들은 피부로 땀을 내뿜고, 입으로 욕을 내뿜는다. 수경은 이를 ‘공해’라 칭하며 그것이 자신에게 쌓인다고 말한다. 수경은 그 공해를 이정에게 배설한다. 이정이 자신은 누구한테 푸냐고 묻자 “너도 딸 낳아.”라고 답한다. 딸은 배설의 대상이고 수경이 배설하는 욕설과 폭력은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땀이 나오지 않게 할 수 없듯 수경은 욱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차가 급발진하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사람이 자연스럽게 배설하는 것들. 땀, 생리혈, 정액, 폭력 등의 끈적한 배설물들은 불쾌함을 자아낸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그것과 멀어질 수는 없다.


극의 후반부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어둠은 집이라는 공간을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말하자면 집은 거대한 포궁이 되고야 만다. 목욕하는 수경에게 이정이 태초의 빛처럼 플래시를 비추어준다. 일방적으로 엄마의 나신을 비추던 빛은 수경이 속옷을 입자 서로를 비추게 된다. 이들은 일순 맨 몸의 동등한 존재가 된다. 어두운 거실로 나온 이정은 냉장고에서 흘러나온 물을 밟게 된다. 이정이 마치 양수가 터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자 수경은 이를 닦는다. 태초의 한 몸이었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폭력과 의존 없는 독립

20대 후반의 이정은 작은 학습지 영업회사에 다니며 모아둔 돈도 없다. 전혀 독립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다. 수경은 집안에 보탬이 되지도 않고, 독립하지도 않는 이정이 자신의 폭언과 폭력을 감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사실이든 아니든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이정은 한시도 벗어나 본 적이 없고, 그럴수록 점점 위축되고 무기력해져 갔다. 느리고 의존적인 이정은 특히나 사람 사이의 선을 모르는 어른으로 자랐다.


이정은 우연히 가까워지게 된 직장 동료 소희(정보람)에게 딸처럼 혹은 엄마처럼 의존한다. 하지만 소희는 자발적으로 노력해 집을 나온 인물이다. 소희도 아마 공해 같은 누군가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이리라. 자기의 모든 것을 받아주기를 바라는 이정의 마음은 소희에게 부담이 된다. 이정은 수경의 폭력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폭력과 공해로 가득했던 세상에 나타난 소희라는 존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새로운 집으로 느껴진 것이다. 그런 감정은 누구도 쉽게 받아줄 수 없고 직장 동료는 특히 아니다. 무심코 건넨 친절함을 끈질기게 부여잡으며 이정은 소희에게 공해를 뿜어낸다. 타인의 마음을 아랑곳 않고 쏟아내는 감정, 그리고 의존과 집착은 또 다른 폭력이다.


소희의 “마음대로 하게 두지 마세요.”라는 말은 폭력에 지지 말고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아가라는 말이지 선을 넘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소희에 대한 이정의 집착이 극에 치닫는 순간 급발진하는 차는 관계의 종지부가 된다. 차가 폐기 처분되며 폭력으로 가득한 집이라는 선택지와 일말의 도피처가 되었던 차라는 선택지도 처분된다. 이제 이정은 집도 차도 없이 두 발로 꼿꼿이 서서 자기 자신으로 시작해야만 한다.


숨을 참으면 사이즈를   없어요

끊기듯 끊기지 않는 모녀 관계는 어둠 속에서 재정립된다. 자신의 발로 집을 나온 이정의 모습은 집이라는 포궁에서 다시 태어난 존재다. 이정은 난생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속옷을 산다. 직원은 자신의 사이즈를 모르는 이정의 몸 둘레를 재어주며 “숨을 참으면 사이즈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말에 이정은 처음으로 숨을 쉬어보는 사람처럼 그렇게 숨을 쉬었다.


숨도 쉬지 못하고 살아왔다. 몸만 자란 아이 같던 이정은 처음으로 자신의 크기를 알게 된다. 그 모든 배설의 끝에 마침내 이정이 뱉어낸 것은 자유의 숨이었다. 숨 막히는 공해와 폭력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내쉬어보는 자유의 숨이 이정에게 진정한 삶의 시작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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