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두 codu Jan 19. 2023

존재의 빈자리와 삶의 기억을 따라가 발견한 숲

영화 <애프터 양>(2021), 코고나다 감독

<애프터 양>은 삶의 흔적을 부지런히 주워섬기는 영화다. 영화의 장면 장면을 한데 그러모으면 삶이란 것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 느낌에 동의하기 위한 전제는 로봇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일 테다. 영화 <애프터 양>은 양의 기억들로 이루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테크노 사피엔스, 즉 로봇인 양이 작동을 멈추자 제이크는 양을 고치기 위해 수리점을 전전하다 그에게 기억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은 죽음이라 일컫는 영원한 멈춤 이후로 제이크는 양에 대해 알기 시작한다. 양의 끝이 곧 시작인 셈이다. 양이 남긴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양의 기억들에는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모든 것이 담겨있다. 제이크가 확인하게 된 짧은 이미지들은 기억이기보다 삶이다. 비인간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삶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로봇의 육체와 기억장치라는 정신이 분리됐을 때 영혼의 자리는 어디인가. 양의 영혼은 카메라의 자리에 위치한다. 영화는 무엇보다 빈자리에 주목한다. 가족들이 밥을 먹고 떠난 식탁, 양의 빈 침대와 같은 빈자리를 고요히 응시하는 동안 관객은 마음속으로 가족들의 식사를, 양의 모습을 빈자리에 채워 넣게 된다. 이는 양의 기억과 마찬가지다. 양의 기억 중 빈 그네와 오솔길은 에이다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부재의 공간이 된다. 영화의 시선은 양의 시선과 일치한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멈춤은 양의 실존을 확신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양은 영화의 대상이자 화자로서 보이지 않지만 모든 공간에 존재한다.


제이크와 키라 부부는 중국계 아이 미카를 입양한다. 부부는 미카가 중국 문화와 유산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문화 테크노’라 불리는 중국인 형제 양을 구입했다. 흑인과 백인, 동양인 이제는 테크노까지 한층 더 다양한 문화적 가치를 지닌 진정한 다문화 가족이 탄생한다.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테크노와 복제인간이 가족의 일원인 경우는 드물지 않다. 다만 백인인 제이크는 딸이 복제인간인 이웃 조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불쾌감이 아니라 종차별이 된다. 제이크는 차별과 혐오에 무딘 인물이다. 동양인 혐오자로 암시되는 사설수리소에 미카와 함께 가고, 동양인 테크노 양을 맡긴다. 미카는 학교에서 ‘진짜 부모들’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제이크와 키라는 미카의 부모님이지만, 생물학적인 부모는 아니다. 양은 미카에게 ‘접목’으로 자신이 온 나무와 현재의 나무 양쪽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다른 나무에서 온 가지를 나무에 붙이며 가지는 그 나무의 일부가 된다. 양은 미카 역시 가족나무의 일부라고 말한다. 미카는 “오빠도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양은 이에 대답하지 않는다. 양의 본래 목적은 말하자면 다른 나무에서 온 가지를 나무에 고정하는 철사에 가깝다. 그 철사도 나무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이 회상장면은 유일하게 양의 기억장치로 엿보지 않은 기억이다. 접목 시퀀스의 앞뒤로 누워있는 양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회상은 마치 양의 꿈처럼 제시된다. 양이 마지막으로 떠올릴 기억이 있다면, 그것이 이 장면이다. 양은 가족나무의 일부가 되었는가?


<애프터 양>에서 가족이 한 팀으로 기능하는 장면은 월례댄스대회 장면이다. 4인가족은 한 몸이 되어 각종 전투기술을 기반으로 한 동작과 지진이나 토네이도와 같은 재해에 대비하는 훈련 같은 댄스를 한다. 누구의 실수인지 알 수 없으나 탈락하자 가족들은 그제야 양이 고장 나버린 것을 알게 된다. 한 팀이 되기 위해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던 양이 가족이라는 팀에서 탈락하고 만 것이다. 제이크는 양이라는 존재를 그 목적으로만 대했다. 양은 가정에 소홀하고 아버지로서 무능력한 제이크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존재다. 제이크는 양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기억의 흔적을 좇는다. 양의 기억은 알파와 베타 그리고 현재인 감마로 나뉘어 있다. 제이크는 양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알파의 기억까지 거슬러간다. 영화는 양을 물질적, 기능적 존재로만 대했던 제이크가 양을 인간과 다르지 않은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제이크의 이해에 따라 양은 가족의 일부가 된다. 양의 기억을 따라가며 제이크는 양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워하게 된다.


제이크가 기억장치를 조회할 가장 처음에 본 이미지는 에이다였다. 양의 기억에서 자신은 알지 못하는 여성의 모습을 마주한 제이크는 당황한다. 에이다의 기억은 양이 그저 미카를 돌보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적 존재가 아니라 개인의 서사가 있는 독립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제이크가 알던 양은 그의 일부에 불과하다. 제이크에게 양은 그저 중고로 싸게 산 로봇, 중국의 문화와 지식을 미카에게 알려주고, 보모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적인 존재였다. 양의 기억은 제이크로 하여금 양의 개인성, 실존성을 깨닫게 한다. 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기억에 저장한다. 거울은 본다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자아정체성 분별의 기준으로 쓰인다. 그런데 안드로이드가 거울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녹화까지 한다는 것은 자아를 분명히 보여준다. 제이크처럼 양이 인간이 되고 싶었으리라는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싶지는 않다. 양은 인간이 되기보다 모든 것을 진짜로 느끼고 살아보기를 원했다. 지식이 아니라 경험을 원했다. 차를 정말로 느껴보고 싶었고, 나비의 아름다움을 진실로 느껴보고 싶었다.


<애프터 양>은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느림의 미학을 담고 있다. 오래된 카메라와 천천히 우려 지는 차 그리고 생명이 다하고 찾아오는 뒤늦은 이해가 그렇다. 제이크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차를 찾는 과정에 매료된다. “복잡한 물질을 추적하고 흙, 식물, 날씨 그리고 삶의 방식과 연결하는 과정”이 한 잔의 차 안에 깃든다. 차 안에 세상이 담겨 있듯이 기억에도 삶이 담겨있다. 천천히 차가 우러나는 과정을 봐야 차의 세계를 알 수 있듯이 삶을 천천히 바라보지 않으면 놓치는 것이 너무나 많다. 양의 기억을 보며 제이크와 키라는 각자의 기억을 떠올린다. 중첩되는 목소리와 반복되는 쇼트들 사이로 양과 제이크, 키라의 기억이 섞여든다. 그 기억들의 틈새에서 양은 현존한다. 키라는 양의 기억을 보기 전에 누가 부른 듯 문득 카메라를 바라본다. 마지막 장면에서 제이크와 미카의 모습은 사진을 찍은 듯 멈춘다. 양의 시선에서 담은 이 짧은 이미지 안에 모든 삶이 담겨있다. 이것은 삶의 재현이며 우리는 양이 편집한 삶을 삶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진동으로 전하는 경험이 아닌 경청의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