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옹에서 소소하고 행복하게

by 모아

오늘은 그간 여러번의 이동과 동행 구하기와 관광으로 파김치가 되어, 많은 걸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걸어놓지 않으면 숙소에서 하루종일 뒹굴것 같아서 전동자전거 투어를 신청하고 그것만 가자 싶은 마음으로 빈둥거렸다. 더워서 좀 힘들긴 했지만 잘한 선택이었던 거 같다.


사실 자전거로 후다닥 돌아본 리옹은 그렇게 인상적이진 않았지만, 늘 조금이라도 사람과 닿고파하는 나의 욕구에 맞게 가이드 친구와 얘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또 높은 언덕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는 기분도 짜릿했다. 리옹에서는 여길 속속들이 돌아봐야한다는 부담 없이 하고픈 만큼만 구경했다.

예쁜 언덕배기와 너무 더웠던 하루

오늘 되게 기분 좋았던 순간 중 하나는 어이없게도 물건을 싸게 잘 샀을때였다. 여행 내내 고심하던 썬스프레이를 큰맘 먹고 12유로 주고 샀는데 거의 반값이나 할인을 해서 6유로(8천원?)가 찍혔던 것이다. 사기 전에 살짝 찾아봤는데 한국에서 인기가 있어보이진 않았지만, 직구하려면 5만원은 줘야하는 물건이었다. 우왓! 마트 밖에서 기쁨의 환호를 내뱉으며 칙칙 팔다리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썬스프레이를 사면서 궁극의 감성템인 유럽산 납작복숭아도 한알 샀는데, 이 역시 되게 고민을 하던 터였다. 그동안 어느 나라 마트에서든 숱하게 봐왔지만 다 맛이 없어 보여서 한참을 고민했었다. 사서 소중하게 가방에 넣어놓구 잊어버렸다가 옆에 앉은 여자가 사과를 아삭아삭 베어먹는 걸 보면서 아차! 복숭아! 하고 얼른 꺼내다 먹었는데 내 복숭아도 아삭거리고 맛이 좋았다.

너 생각보다 맛이 좋구나

유럽은 과일을 한알을 사도 눈치를 주지 않아서 끽해야 50센트(700원?)도 안하는 가격이었는데 퍽 만족스러웠어서 또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보니, 처음 베를린으로 들어와 내게 맞는 여행 스타일이 뭔지 전혀 감을 못잡고 울적해하던 와중 그나마 즐거웠던 기억이 우습게도 이케아에서 장을 봤을 때였다.


Zegg 공동체에 들어가기 전에 타월과 담요가 필요하다는 말에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이케아에 가면 있겠지 싶어 당당히 구글맵을 찍고 베를린 이케아로 향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이케아는 역과 겁나 멀리 떨어져있는데, 당연히 땅을 큼직큼직하게 쓰는 베를린도 마찬가지였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동안 많이 지쳤지만, 결국은 이케아에 도달했고, 영어를 못하는 직원에게 파파고를 보여주며 타월과 블랭캣이 어디 있는지 들었다. 14번 코너..중얼중얼 거리며 애써 수건이 파는 곳에 가서, 제일 싼 수건을 쥐잡듯 뒤졌는데 처음엔 내 생각보다 넘 비싼 수건들 뿐이라 엄청 실망했다. 그래도 끝까지 뒤졌더니 구석탱이에 2유로 하는 아주 후줄근한 수건이 보였다! 횡재다 싶은 마음으로 집어들었다.


다음엔 담요였는데, 담요 역시 싼 가격에 사고팠지만 나는 촉감에 예민해서 밤새 덮고 잘 거라면 촉감은 좋았음 했다. 너무 비싸지 않은 선에서 보들보들한게 무얼까 한참을 이것저것 만져보다가, 결국 7유로 하는 연초록색 담요를 집어들었다. 한참을 골라서 마음에 꼭 드는 녀석이었고 10유로도 쓰지 않았던 것이 무척 기뻤다. 이 담요는 나중에 웃긴 썰을 만들어내는데, 공동체에 같이 머물었던 여자분이 색만 다른 같은 담요를 갖고 있어서 내 담요를 척하니 두르고 돌아다녀서, 미안한데 내꺼인 거 같다고 말해 서로 빵터진 기억이 있다. 그분은 아주 세련되게 잘 차려입는 중년 여성분이었는데, 내 미감이 그분과 비슷하다면 나쁘지 않은걸? 하고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그 여느 여행보다 돈을 펑펑 쓰고있는 유럽 여행에서 이런 소소한 알뜰함이 나의 즐거움이 된다는게 스스로 신기하다. 20대 중후반쯤엔 꽤나 극단적으로 소비를 안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내가 지금만 할 수 있는 경험에는 돈을 쓰자는 주의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한번 쓰고 말게되는 물건이나 식사에 많은 돈을 쓰는건 아까워서 정신을 못 차린다! 베를린에서 한번 멘탈이 터졌던 것도 큰 돈을 주고 서커스를 예약했는데 성차별적이고 고리타분한 최악의 쇼를 보게 되어, 내가 그딴 소비를 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어쩌면 나는 타고난 미니멀리스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그런 삶을 더 구체적으로 살고 있을지도? 지금은 그냥 이런 소소한 일상들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비교적 혼자있는 시간이 많았어서 사진을 찍고 다녔다. 아주 어렸을 적 혼자 밤산책을 하며 사진을 찍었었는데, 그 느낌이 되게 좋았는지 오래 간직하는 추억이다. 그때는 주로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 사진을 찍었다면, 오늘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내키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좋아하는 사진작가의 스타일을 따라하기도 하고, 눈길이 가는 걸 대중없이 찍기도 하고, 그런 일들도 퍽 즐거웠다.

리옹의 단정했던 건물들, 요시고 사진을 떠올리며 찍었다

여행 계획은 하나도 세우지 않고 나를 유럽에 던져버린 탓에, 시행착오가 꽤나 많은데, 그런 만큼 내게 맞는 여행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결이 촘촘해지는 것 같다. 어떤 때는 여느 한국인들처럼 동행을 구하고 내 사진을 잔뜩 찍는게 나에게 맞고, 다른 때는 한국인 하나 없는 공동체에 뚝 떨어져서 서울에서 만나기 힘든 영혼들을 만나 교감하는 것에 지극한 행복을 느낀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휴양지도 행복하다

어쩌면 나는 후자의 여행만을 진또배기 내지는 간지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했던거 같은데, 그냥 남들 하는만치 하는 여행도 퍽 괜찮았다. 여행 허세가 조금 벗겨졌나보다. 아마 관광만을 오래 할 수는 없을것 같지만, 공동체에서 깊고 깊은 2주를 보낸 후에는 정신적으로 좀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참이어서, 여행지에서의 가벼운 인연들이 아쉬우면서도 편하기도 했다. 모든것은 저가 있는 흐름이다.


이제 슬슬 이동과 관광이 지쳐가는 즈음에 떼제 공동체에 들어간다. 또 좋은 새로운 흐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엔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다. 깊은 우정과 사랑, 불안과 같은 굵직한 이야기들을 얼른 풀고 싶은데, 오늘은 그런 무거운 글을 쓸 기분이 아니어서, 소박한 여행지에서의 일상을 일기장에 주절거리듯 쏟아내 보았다. 이런 작은 순간들도, 어쩌면 생각날 것 같은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