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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 Aug 31. 2023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내가 어떤 계기로 유럽에 가게 되었는지. 그 계기로부터 여행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어느날 받은 편지

여행을 결심하기 몇달 전, 발신인 불명의 편지가 왔다. 편지는 특별할 것 없는 봉투에 담겨있었고, 영어로 우리집 주소가 적혀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뜻밖에도 익숙한 한글로 빼곡히 적힌 편지지가 나왔다. 그 내용은 이랬다.



안녕, 채영아. 잘 지냈어? 나는 지금 공원에서 편지를 쓰고 있어. 지금 여기는 한낮이야. 사람들은 맨발로 풀밭을 가로지르거나 손을 잡고 걷고 있네. 아마도 네가 여기 오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기억하는 네가 아직도 그대로일지는 모르겠지만. 


너와 함께하지 않은 시간은 함께한 시간보다 두껍게 쌓여가는데 아직도 종종 너를 생각한다는 게 신기해. 너도 내 생각을 가끔은 할까? 


솔직히 말해 너에게 평생 연락을 하고싶지 않았어. 널 생각하면 고통스럽고 화가 났거든. 너를 외면하는게 그동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너를 그렇게 남겨두면 안됐어. 아마도 무척 괴로웠을 거라 생각해. 


채영아, 나는 너를 내 방식대로만 사랑했어. 그게 가장 미안해. 그게 모든 잘못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 너와 나는 사랑을 초월하는 깊은 유대를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내가 얘기했었지. 내가 대학교에서 얻은 인연은 단둘 뿐이라고. 전에 사귀었던 친구와 너. 그런데 여자친구와는 헤어져서 다신 볼 수 없는데, 너는 내 친구니까 평생 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그게 오로지 나만의 욕심으로 만들어진 무리한 요구였는데, 나는 그걸 믿었어. 아니, 믿고 싶었어. 널 잃어버리면 내 세상이 조금 무너질 것 같았거든. 


너의 고백을 거절하고 친구로 돌아와달라는 이기적인 부탁을 해놓고, 모른 척 괜찮은 척 몇달을 보냈지. 결국은 네가 나와 친구로 남을 수 없겠다고 했어. 처음 그 말을 듣고 무척 깊은 배신감이 들었던 기억이 나. 그때 나는 군대에 있었잖아. 사실 군대가 맞지 않아 많이 힘들었거든. 네 생각을 하며 버틴 날들도 있었어.  


그때는 그냥 나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는 너에게서 도망가고 싶었던 것 같아. 너무 화나고 슬프고 괴로웠어. 마음의 정말로 깊고 어두운 곳에는 아직도 너를 조금은 원망하고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해. 평생 곁에 있어주기로 하지 않았냐고 말야. 


계속 변명만 이어지는 것 같네. 나 진짜 못난 친구다! 조금 쉬엄쉬엄 편지를 써볼게.



편지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펜의 색깔이 바뀌어 있었다.   



아! 정말 싫다. 사실 정말 많이 종이를 찢어버렸는데 또 다 찢고 싶어. 어쨌든 내가 하고싶은 말은 내가 너무 비겁했다는 거야. 너와의 관계에 더 깊게 빠져드는게 너무 무서웠어. 또 죽을만큼 상처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하고싶지 않아도 이미 시작되어 버리는 것들이 있더라. 나는 너를 이미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냥 그 자리에서 시들어버릴 때까지 외면만 했었어. 그리고 용기내 직면한 너를 좀스러운 태도로 밀어내기만 했었지. 심지어 다시 친구로 연락할 수 없을까 물어보던 너도 단칼에 끊어냈었고. 지금은 네가 나를 싫어하더라도 이해할 것 같아. 


애초에, 너는 나를 왜 그렇게도 사랑한거니? 

그건 정말 이해가 안되지만 내가 좋아한 너는 쉽게 꼽을 수 있어. 너는 한없이 예민하고 불안해서 나와 닮아 있었고, 그렇지만 동시에 단순하고 깨끗하기도 했어.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건 늘 티가 났어. 나를 바라보는 눈에서 한번도 열정을 거둔 적이 없었지. 내 시덥잖은 헛소리를 진짜인가 고민하던 너, 내 공연을 보러 와준 너, 내가 쓴 곡을 들으며 감상을 꾹꾹 눌러담아 주던 너, 예쁘게 하고 병문안을 와서 같이 산책을 해준 너. 과분한 애정을 받으며 건방지게 굴 때가 많았지만 나도 너를 많이 아꼈어. 너라는 사람을 인생에서 발견하고 알아갈 수 있어서 기뻤어. 


내가 뭐라고 그런 너에게 이렇게 큰 상처를 준걸까? 내가 이제와 해줄 수 있는건 많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주절거린다고 과거를 바꿀 수도 없지만, 적어도 너에게 마무리를 지어줄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에 편지를 쓴거야. 무언가 이루어질 듯한 중심의 언저리를 맴돌기만 했던 우리 사이가 돌연 끝나버린게 답답했을 것 같아서. 맺음이 없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몰두하는 법이잖아. 


혹시 내가 너를 사랑했었는지 의심한다면 그건 거두어도 돼.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했어. 우물쭈물 했지만 연심에 한없이 가까운 마음으로 말야.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너랑 사귈 순 없었을거야. 그 두가지 모두 시간을 돌리더라도 바꿀 수가 없네. 슬프다.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건, 네가 정말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람일 거야. 너는 반짝이고, 힘이 넘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그걸 잊지 말고 살아갔음해. 이미 너도 알고 있지? 


그러니 오랜만에 마주한 스무살 적 겁쟁이 녀석은 훨훨 털어버리고 멋지게 살아가길 바래. 이 편지를 모두 읽고 내게 답장을 쓸 마음도 들지 않을 만큼, 네가 후련하고 충만하기를.


사랑을 담아, 허웅 보냄






그 애는 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여전히 섬세하고 다정한 말씨였다. 웅이를 알게 된 이후로 지금까지 그는 늘 내 마음에 작은 개울처럼 흐르고 있다. 편지를 읽으며 정말 오랜만에 그 물에 발을 담근 것만 같았다. 그리움과 아쉬움, 슬픔과 서투른 애정, 너무 닮은 사람끼리만 가질 수 있는 서로에 대한 깊은 연민 같은 감정들이 흘러넘쳤다.


웅이는 내게 답장할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후련했으면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답장을 하고 싶었다. 저 혼자만 멋진 말들로 정리하면 다인가? 나는 그처럼 마무리를 짓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한때 나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을 흘려보낼 수 없어 구질거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소식이 끊긴 지 오래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그는 독일에 살고 있었다. 영어로 된 주소, 지금은 한낮이라는 이야기. 아마도 그는 아직 독일에 있는 것 같았다.


일단은 독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곧 비행기표를 끊었다. 무엇을 찾으러 가는지 몰랐고, 정말로 그를 만날 용기가 내 안에 있는지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아니, 독일에 있긴 한 건지도 몰랐다. 일단은 유럽에서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을 해나가다가, 마음이 내키면 그를 찾아볼 요량이었다. 이것이 내 여행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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